07.이제 선포하는 복음이 아니라 보여주는 복음이 필요합니다:일터에서 성도의 최상의 삶을 발견한 박종문 선교사
- 보현 전
- Aug 12, 2022
- 13 min read
Updated: Sep 23, 2022

Q: 본인과 하시는 사역에 대해서소개를 부탁드립니다.
A: 직장에서 크리스천으로 열심히 살아오다가 지금은 교회에서 선교사(Layman Pastor)로 섬기고 있는 박종문입니다. 대학교 4학년 때 진로에 대해서 고민을 했습니다. 당시는 신앙이 좋으면 다 신학교에 가는 것이 일반적인 교회의 분위기였습니다. 제게 두 분의 신앙 멘토(Mentor)가 계셨는데 그중 한 분이 장로님이셨습니다. 그분께서 제게 신학교 가는 것을 권면하셨습니다. 지금도 드물지만 당시에는 비록 장로라고 하더라도 목회자가 아닌 사람이 교회에서 설교 한 번을 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비록 장로가 되었지만 목회자가 아니기 때문에, 부름받은 성도로서의 삶에 어떤 한계를 느끼신 것 같습니다. 그게 제 멘토이셨던 장로님께는 평생에 아쉬운 점으로 남았던 것 같습니다. 또 다른 한 분은 청년부 담임 목사님이셨는데, 그분은 공무원으로 1년 정도 사회생활을 하시다가 신학교에 가신 분이었습니다. 그 분이 신학교에 가보니 두 부류의 사람을 볼 수 있었다고 하시면서, 그 중 한 부류가 소명을 받아 목회에 헌신하려는 사람이었고, 다른 한 부류는 일종의 도피처를 찾아온 사람들이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종문 형제가 사회 속에서 잘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신학을 해도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신학을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하셨습니다.
20대 청년이 즉각 결정하기에는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그날 집으로 돌아와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저 역시 신앙이 좋은 사람들 옆에 머무르고 싶어 하는 즉, 도피처를 찾는 생각이 마음 깊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날 처음으로 무릎을 꿇고 평신도로서 헌신하겠다는 기도를 했습니다. 세상에서 크리스천으로 한 번 살아보겠다는 서원을 하나님께 했습니다. 그렇게 기도하고 군대를 다녀와서 직장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큰 뜻을 품고 기도는 했지만 정작 현실은 판판히 깨지는 일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직장인 성경공부모임 (BBB: Business Bible Belt)이라는 직장선교 단체를 만났습니다. 평신도들이 일터를 섬기기 위해 만들어진 선교 단체였는데, 그 단체를 통해서 삶의 현장에서 전도하고 제자 삼는 것의 중요함을 배웠습니다. BBB 이전까지의 직장 생활은 늘 차선책 같은 느낌을 주었습니다. 목회자나 선교사들은 저렇게 하나님께 헌신하고 있는데 “나는 편안한 환경에서 많은 급여를 받으면서 너무 좋은 세상에서 살고 있지는 않은가?” 또 “이러한 안락함을 포기하기 두려워서 용기를 못 내고 있지는 않은가?”라는 죄책감이 언제나 마음 한 편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BBB를 만나고 나서는 기존의 교회 사역과는 또 다른 사역이 존재함을 알게 되었고, 이를 통해 이전까지는 발견하지 못했던 삶의 새로운 가치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단순히 무엇이 더 좋고 나쁜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다양한 사역의 형태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면서 새롭게 발견한 사역의 영역이 제게는 중요하다는 생각으로 지금까지 BBB 사역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에 지금 섬기는 교회의 요청을 받아 청년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저를 추천하신 분이 평신도도 괜찮겠냐고 담임 목사님께 여쭈었는데, 담임 목사님께서 평신도 사역에 대해서 열려있던 분이셔서 평신도면 더 좋다는 답을 주셨습니다. 담임 목사님도 오랫동안 군목으로 섬기시면서 평신도들의 삶을 경험하셨던 분이시라 그런 열린 생각이 가능하셨던 것 같습니다. 교회 사역을 제안받고 청년부 사역을 시작했는데 벌써 6년 동안 교회에서 청년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올해는 제 역할이 바뀌어서 청년들의 위 세대인 신혼부부들과 새터민 즉 북한에서 오신 분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Q: 말씀 중에 평신도로 헌신하겠다는 기도를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목회를 시작하시면서 헌신기도를 하시는 분들은 많이 보았지만, 평신도로서 헌신하겠다는 서원 기도는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평신도로 사는 것은 굳이 서원을 하지 않아도 가능한 일 아닙니까? 그런데 어떤 마음으로 그때 하나님 앞에 평신도로서 잘 살아보겠다는 결단을 고백하셨습니까?
A: 제가 대학교를 다닐 때 한국 교회에 제자 훈련이 많이 소개되었습니다. 네비게이토 선교회(The Navigators)에서 발행한 제자 훈련 교재나 이와 관련된 책들이 인기가 있었습니다. 그 선교회에 소속이 되지는 않았지만 저도 제자 훈련과 관련된 많은 책들을 읽었습니다. 책들을 읽으면서 제자로 산다는 것에 대해 많이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어렴풋하게나마 세상과 교회가 이원론적으로 분리된 현실을 보기도 했습니다. 저 역시 그런 한계를 모르던 바는 아니었습니다. 제게 세상과 교회에서의 모습이 너무 다르다는 점이 문제로 느껴졌습니다. 기왕 신학을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면 어차피 사회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데 저는 그 안에서 이원론적으로 분리된 삶을 사는 사람이 아니라, 진짜 내가 그리스도의 제자로 삶의 현장에서 그렇게 살아보는 사람의 본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 청년의 때에 제가 한 기도를 생각해 보면 너무 기특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기도를 했기 때문에 BBB라는 선교 단체를 만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런 생각을 참 기뻐하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Q: 일터에서 평신도로 살아내는데 어떤 점이 가장 어려우셨는지요? 그리고 지금 평신도 교역자로서 섬기고 계시는데 어려운 점은 없으십니까?
A: 일터에서 크리스천으로 살아내는 것은 지금 생각해도 참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세상 한가운데에서 나의 정체성을 드러내 놓고 사는 것입니다. 많은 경우에는 교회를 다니더라도 신앙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고 그냥 주일에 열심히 교회에서 섬기고 평일은 믿지 않는 사람들과 전혀 구별되지 않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저는 그리스도에게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크리스천입니다." “저는 예수를 믿습니다.”라는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제가 직장 생활할 때만 해도 술에 대한 도전들이 비일비재하게 많았고 그 속에서 자기 정체성을 드러낸다는 것은 제 행동에 작은 실수만 있어도 바로 신앙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연관 지어 비난을 받을 상황을 각오해야 했던 환경이었습니다. 그런 점들이 일터에서 성도로서 살아가기에 힘든 점들이었습니다. 물론, 저희끼리 007 성도라고 농담을 하고는 했는데, 내가 성도인 것을 절대로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은 그런 삶도 있었습니다. 성도로서의 정체성을 감추면 세상에서 편할 수는 있지만 삶의 현장에서 빛을 비추면서 살아가라고 했던 예수님의 가르침을 외면하게 되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부인하는 삶을 살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또 다른 어려움은 시간과의 싸움이었던 것 같습니다. BBB의 경우는 순장이 되면 일주일에 최소한 4시간씩 이틀 이상의 시간을 모임을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거기에 1:1 개인 양육까지 포함하면 일주일에 8시간에서 10시간을 사역에 쏟아야 합니다. 거기에 한 사람의 직장인으로서 책임져야 하는 업무의 부담도 있습니다. 회식과 야근 그리고 가정을 위한 시간까지 고려하면 정말 다른 사람의 두 배의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삶 같습니다. 감사하게도 저의 경우는 제 아내가 허용적 방임을 해 주었습니다. (웃음) 제가 일터에서 성도로서 살아내겠다는 다짐을 이해해 주고 이를 위한 제 삶을 인정해 주고 응원해 주었습니다. 결국 가족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일터에서의 책임과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가치라는 단어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무엇에 가치를 두고 살 것인가?” “어떤 방향성을 갖고 살아갈 것인가?”가 인생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경우에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으로 살자’라는 삶의 가치 혹은 방향에 따라 살아왔습니다. 비록 완전하지 않고 돌아보면 부끄러운 때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게나마 그 정체성을 드러내고 살았던 게 정말 잘 한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일터에서 생활할 때 ‘나도 장로야, 나도 안수집사야’라면서 현실은 어쩔 수 없다고 타협하면서 살아가는 선배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일터에서 성도로서 보고 따라갈 만한 본을 보여주는 선배를 만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크리스찬 후배들이 성도로서 일터에서의 삶을 포기해 버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혼자서 간다면 길이 되지 않겠지만, 여러 사람들이 함께 가면 수풀에 길이 나는 것처럼, BBB를 통해서 후배들이 따라갈 수 있는 흔적 정도는 남길 수 있지 않았는가 생각해 봅니다. 고군분투하면서 예수의 가르침대로 살려고 노력했던 것이 누군가에게 작게나마 본이 되고 따라올 수 있는 길잡이가 되어 준다면 일터에서의 제 삶이 매우 의미 있는 시간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일터에서 성도로서 살아내는 삶에 도전하지 않았을 때는 마음속에 늘 갈등도 많고 공허함이 있었습니다. 저는 BBB 사역을 시작하기 이전에도 정말 열심히 교회를 섬겼습니다. 주일 학교 교사로도 열심히 섬겼고, 일터에서도 신우회도 만들어서 총무로도 섬기고 했지만 사역의 열매도 보이지 않았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가 혼란스럽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BBB를 통해서 직접 영혼을 섬길 수 있는 기회를 가지면서 청년의 때에 가졌던 마음, 즉 예수님께 헌신을 다짐했던 마음이 되살아 났습니다. 특히 회사를 다니던 중에 울산으로 발령이 나서 모임을 직접 개척했던 일이 제게 직장 사역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울산에 발령을 받아 내려가면서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모임 개척에 대한 강한 열망과 부담감이 생겼습니다. 맨땅에 헤딩하듯이 누가 하라고 한 것도 아닌데 왜 하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모임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고민하고 도전하면서 간증이 될 만한 많은 일들을 경험했습니다. 이런 경험들이 쌓이면서 일터에서 성도로 사는 것이 너무 행복한 삶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때 비로소 제 삶에 베스트(Best)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이전에는 늘 차선(Better)의 삶을 살았던 것 같은데 내가 사역자로 살기를 결심하고 그렇게 살아보았을 때 하나님께서 매우 기뻐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생각하면 소름이 돋을 정도로 하나님에 대한 놀라운 경험들이 많았습니다. 이 삶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러면서 목회의 길을 걷던 선배들이 일터에서 살아내는 제 삶을 인정해 주고 격려해 준 것이 힘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도 일터에서 살아내는 삶을 자신 있게 후배들에게 도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신학교에 가서 목사가 될 필요는 없다. 삶의 현장에 들어가서 그렇게 살아내는 사람들도 필요하다.” “평신도 직장 사역자로 산다는 것은 한 사람이 살아내는 삶 중에서 베스트의 삶이다.”라고 말입니다. 저는 지금도 그 삶이 절대로 무엇인가가 부족한 삶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개인의 삶을 평가해 본다면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그렇게 잘 살아냈는가에 대해서는 부끄러운 부분도 있기는 합니다.
지금 평신도 교역자로 교회에서 사역을 하고 있지만, 직장 선교사로서의 삶이 지금의 사역에 자산이 되어 주고 있기 때문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지는 않습니다. BBB에서 받았던 훈련과 사역의 경험들이 사역을 어려움 없이 사역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어주는 것 같습니다. 교회 사역을 시작하고 나서, 신학교에서 신학 교육을 받기도 했었는데, 실질적으로 제 사역에 큰 도움이 되지는 않는 것 같았습니다. 또한 지금 섬기는 교회에서 일터 선교사로서 살아왔던 제 삶을 인정해 주셔서 교역자로 인정해 주시고 지원해 주시는 부분도 평신도 교역자로서의 사역이 잘 이루어질 수 있는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

Q: 말씀 중에 소름이 돋을 정도의 경험들이라고 하셨는데,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 하나를 소개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A: 일터 선교사로 섬길 때에 종종 제가 근무하던 회사가 아닌 다른 회사의 신우회에서 말씀을 전해달라는 요청을 받곤 했습니다. 그날도 다른 회사에서의 요청이 있어서 말씀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산불이 났습니다. 저는 가스 회사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산불이 번지게 되면 가스 저장고에도 영향을 줄 수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전 직원이 대기를 하게 되었고, 당시에 팀장이었던 저는 팀원들보다 더 늦게까지 남아서 상황을 확인하고 정리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섬김을 요청한 형제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못 갈 수도 있다고 전화를 했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생각해 보니, 제가 그 모임에 못 가는 게 하나님께서 정말 기뻐하시는 일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구름 한 점 없는 화창한 날씨였지만 성경에 기록된 대로 엘리야에게 보내주셨던 비를 내려주는 비구름을 제게도 보내주시기를 기도를 했습니다. 모임에 참석하려면 퇴근 시간 전에 상황이 끝나야 하는데 퇴근 시간이 다 되도록 비구름은 커녕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가 계속되었습니다. 그런데 퇴근 시간이 다 될 무렵 상황이 해제 되었다고 정상 퇴근을 하라는 지침이 내려왔습니다. 비록 제가 기도한 대로 비구름이 몰려오지는 않았지만 소방 헬기가 조기에 진화에 나서서 무사히 산불이 잡혔다는 놀라운 소식이었습니다. 그날 모임에 가서 얼마나 신나게 이 일을 이야기 했는지 기억이 선명합니다. 일터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이런 놀라운 일들을 수 없이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일터의 크리스천들이 가장 피하고 싶은 순간이 저녁 회식이었습니다. 회사 돈으로 맛있는 음식에 비싼 유흥 주점도 갈 수 있기 때문에 믿지 않는 분들은 고대하는 시간이었지만, 술에 취하지 않으려던 성도들은 그 시간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곧 닥쳐올 수모와 곤란함으로 인해서 스트레스를 받고 두려움을 느끼곤 했습니다. 당시 경쟁사와 정기적으로 교류하는 모임이 있었는데, 식사를 마치고 유흥 주점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저는 술집 밖으로 조용히 나와서 앉아 있었는데, 경쟁사 팀장이 곧 뒤따라 나왔습니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이 분도 신실하게 하나님을 믿는 분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광란의 밤을 보내고 있는데 성도 둘이 앉아서 두 시간 넘게 성도 간의 교제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세밀한 돌보심을 느꼈습니다. ‘그냥 무가치하게 흘러갈 수 있는 시간, 내가 정말 하나도 기대하지 않았던 시간인데 그 시간조차 하나님께서는 이런 귀한 만남으로 채워주시는구나’ 싶었습니다. 일터에서도 성도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습니다.
Q: BBB라는 선교 단체가 지금도 선교사님 삶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흔히 파라처치 (Para-church)와 로컬 처치(Local-church)로 구분하기도 하는데 지금은 두 개념 간의 논쟁이 많이 사라진 것 같지만, 과거에는 파라처치에 대한 비판과 이에 대한 항변도 치열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파라처치와 로컬 처치를 모두 경험하신 입장에서 두 교회를 가장 잘 비교해 주실 수 있으실 듯한데 두 형태의 교회를 비교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A: 저도 BBB 사역을 시작하고 나서는 로컬 처치 사역에 깊이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시간적으로 부담스럽기도 했고 그래서 주일 예배를 중심으로 로컬 처치 생활을 했습니다. 지금은 거꾸로 사역자로서 지역 교회 사역에 깊이 관여하고 있고, 퇴직한 이후에 일터에서의 사역은 비중이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제 경험으로 말씀드린다면 선교 단체는 지역 교회 보다 헌신된 지체들이 모인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선교 단체는 그 목적과 비전을 듣고 선교 단체의 가입을 개인이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 삶이 너무 부담스러우면 하지 않아도 됩니다. 반대로 그 삶을 선택하면 선교 단체가 내 삶의 한 부분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제 삶의 모습을 선택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직장에서는 은퇴했지만 지금도 BBB모임에 나가고 있습니다. 제가 소속된 BBB 모임은 20년 넘게 교제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중간에 이사를 가거나 이직을 하기도 하지만 이 공동체는 계속해서 유지되고 있습니다. 저희는 오랜 기간 교제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아주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역교회에서 공식적인 형태로 이렇게 오랜 시간 교제를 유지하기가 어렵습니다. 이사를 가게 되면 기존의 멤버십은 단절되고 새로운 교회에서 새로운 맴버십을 쌓아야 합니다. 때로는 지역교회 간의 상이한 정체성이나 문화로 인해서 적응이 어려운 경우도 발생합니다. 그런데 선교단체는 동일한 정체성을 가진 공동체가 전국에 있고 내가 어디를 가든지 같은 가치와 문화를 통해서 쉽게 교제하고 모임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저는 꼭 BBB가 아니더라도 이런 안정감 있는 공동체, 평생 가는 공동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많은 분들께서 그런 유익을 누리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선교 단체에서는 일반적인 성도들의 삶보다 더 높은 수준의 삶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이런 높은 수준의 삶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모임입니다. 선교 단체는 높이 설정된 수준을 따르지 못할 때 긴장감이 생기게 됩니다. 자신도 높은 수준의 삶을 살아내려는 동기가 생기고 이를 공동체가 도울 때에 그 자신이 헌신된 사람으로 훈련되게 됩니다. 물론 훈련의 과정이 고됩니다. 제가 섬기는 BBB의 리더 초급 훈련을 마치고 단체를 떠나는 사람도 매우 많습니다. 리더로서 이 현상에 대해서 매우 마음 아프게 생각하고 계속해서 대안을 찾고 있습니다. 선교 단체는 목적에 동의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비교적 높은 자발성을 이끌어 낼 수 있고 높은 수준의 삶을 살아내기 위한 동력을 만들어 내기가 쉽습니다. 반면에, 지역 교회 사역을 하면서 어려운 점 중의 하나는 하기 싫은 분들을 참여시키는 것입니다. 하기 싫은 분들의 의지를 끌어올리려다 보면 전체적인 에너지 수준은 하향되어 평준화됩니다. 일단 교회에 많은 사람을 모으려고 하기 때문에, 그중에 비자발적인 사람들이 다수 있기 마련입니다. 구역 모임을 하다 보면 참여를 원하지 않는 분들을 동참시키기 위해 구역을 이끄는 분들께서 많은 노력을 하시는 것을 봅니다. 그런데 사역을 위해서 사용되어야 할 에너지가 이 과정에서 소진되어 버려서 사역을 시작하기도 전에 진이 빠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는 좀 더 급진적으로 모임을 원치 않으시는 분들을 억지로 동참시키지 않고 소그룹을 진행해 본 적도 있습니다. 물론 이 경우에 동참하지 않는 분들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의지가 있는 분들끼리 먼저 건강하고 탄탄한 소그룹을 만들어서 의미 있는 교제가 이루어지게 하고, 처음에 관심이 없던 분들도 점차 관심을 갖고 모임에 나오시도록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일단 하기 싫은 사람들이 아니라,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추어서 좋은 결과들을 만들어 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면 전체적인 자발성이 높아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선교 단체와 지역 교회 간의 가장 큰 차이점은 구성원들의 자발성의 수준과 그것을 이끌어 내는 방식에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선교 단체가 더 낫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저도 선교 단체에서 리더십을 둘러싼 갈등을 겪으면서 내가 이 단체에 가졌던 애정과 기대가 환상이 아니었는가 하는 깊은 자괴감에 빠진 적도 있습니다. 정말 삶의 많은 시간을 이 단체에 헌신해 왔는데 모든 것을 내려두고 떠나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간이 만든 조직이 갖게 되는 취약함을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동의 목표와 비전 그리고 사명에 동의한 사람들의 모임이 있다는 것이 굉장히 힘이 되고 서로 자극이 되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모임에 남게 되었습니다. 리더들의 연약함에 실망도 했지만 뒤를 따르고 있는 후배들이 있었기 때문에 단체를 떠날 수 없던 것 같습니다. 공교롭게 그때 교회 사역을 제안받아서 지금 교회 사역을 하고 있는데, 만약 그 위기로 인해서 생긴 BBB에 대한 회의나 의심이 없었다면, 교회 사역을 제안을 받았더라도 거절했을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때 겪은 시련 또한 하나님께서 제 인생을 인도해 가시는 방법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Q: 삶의 현장에서 성도로서, 직장 선교사로서 경험을 쌓으셨는데, 그 경험이 교회 안에서 사역을 하실 때에 어떤 유익을 준다고 생각하십니까?
A: 삶에서의 실제적인 경험들이 보다 실질적인 문제들에 대해 접근할 때 저를 좀 더 설득력 있게 만들어주는 것 같습니다. 교회 사역을 시작하고 FWIA(Faith and Work Institute Asia) Bucket 프로그램을 청년들과 함께 한 적이 있습니다. 삶에서 실질적으로 부딪히는 여섯 가지 주제에 대해서 다루기 때문에 청년들의 관심도가 매우 높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교역자들 중에서 이런 실질적인 삶의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루어 줄 수 있는 분들이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지난번에 돈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저의 경우 제가 돈에 대해서 실패했던 경험도 이야기할 수 있었고, 제 경험을 바탕으로 청년들에게 돈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지도 나눌 수 있었습니다. 나눔 이후에 많은 청년들이 돈에 대해서 이렇게까지 깊이 있게 이야기해 본 적이 없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실제적인 주제와 경험이 갖고 있는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CEO 바이블 스터디를 시작했던 것도 의미가 있었습니다. 우리 담임 목사님께서도 십수 년 동안 생각만 하시고 실행에 옮기지 못하셨던 프로젝트였습니다. 우리 교회의 제직 중에서 사업체를 운영하시는 열두 분을 대상으로 비즈니스와 연관해서 성경을 함께 공부하는 모임이었는데 비즈니스 현장에서의 경험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한국 교회가 그동안 영성에 대해서는 충분히 강조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실천해 내는 삶의 모습이 부족한 것이 지금 한국 교회가 겪는 어려움의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상에서 성도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입니다. 최근에 BBB에서 백석대학교의 채영삼 교수님을 모시고 공동 서신에 대해서 배우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채 교수님께서는 교회 안에서 바울 서신에 비해서 공동 서신이 갖는 중요성이 간과되어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서신서는 초대 교회가 직면한 유대 율법주의와 세상(로마)이라는 두 가지 문제에 대한 교회의 대응 방법을 담고 있는데, 바울 서신이 유대 율법주의에 대한 교회의 대답이라면, 공동 서신은 세상(로마)에 대한 교회의 답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동안 율법주의에 대해 경고하고 가르쳤던 바울 서신에 대해서는 충분히 강조해 왔지만, 지금은 세상으로부터의 도전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를 가르쳐주는 공동 서신에 대해 보다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교회가 맞닥뜨리고 있는 세상에서 어떻게 교회로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지혜가 공동 서신 안에 있다는 말씀이십니다.
이재철 목사님은 자복은 우리의 죄에 대한 고백이기 때문에 단회적 사건 즉 점으로 비유될 수 있는 반면, 회개는 삶의 방향에 대한 지속적 변화이기 때문에 지속적 사건 즉 선으로 비유할 수 있다고 설명하셨습니다. 어쩌면 지금 한국 교회는 점이면 충분하다고 성도들을 가르쳐 온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영접하고 난 이후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강조가 없습니다. 제가 아는 집사님께서 작은 IT 기업을 운영하시는데, 아내분께서 회사를 도우러 오셨다가 너무 기가 막힌 상황을 보시고는 제게 하소연을 하셨던 적이 있습니다. 남편분이 열심히 개발한 결과물이 이익을 내면 중간에 그것을 가로채고 빼앗으려는 분들이 나타나는데, 많은 경우에 그분들이 교회에서는 다 장로고 안수집사더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교회에서는 리더일지는 몰라도 세상에서는 상식적인 정의조차 지키지 않는 분들이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저는 지금 한국 교회가 성경이 요구하는 높은 수준에 이르는 것 까지는 바라지도 않고, 사회가 요구하는 상식 수준만 되어도 좋겠습니다. 사회의 상식 수준에서 벗어나는 일들에 교인들이 너무 많이 끼어있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 BBB에 있는 한 자매에게 어떤 분께서 오셔서 교회 다니냐고 물으시면서 성경을 전해 주셨다고 합니다. 전도를 위해서 그러신 것이 아니라, 자기가 교회에 너무 실망해서 이제 그만 나가려고 하는데 차마 성경을 버릴 수 없으니 당신에게 주려고 한다는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지난 코로나 상황에서 교회에 대한 사회의 시각을 우리가 보았습니다. 교회가 입으로 고백하는 영성과 살아내는 삶의 실천의 괴리를 줄여야 합니다. 지금 한국 교회는 살아내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Q: 한국 교회를 보시면서 가장 안타까운 점은 무엇입니까? 그럼에도 희망을 어디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A: 안타까운 점은 누군가에게 교회를 소개시켜주어야 할 때에 소개시켜 줄 교회를 찾기가 어렵다는 점입니다. 단지 이단에 대한 이야기뿐만이 아닙니다. 선교단체의 한 후배가 최근에 교회로 인한 고민을 상담한 적이 있습니다. 그 자매가 동네에 있는 작은 교회를 잘 섬기고 있는 줄만 알았는데, 작은 교회이기 때문에 별도의 교육 목사를 두지 않고 담임 목사가 직접 아이들을 교육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에게 설교 시간에 성경에 대한 말씀은 일절 없이 정치, 문화 등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두 시간씩 쏟아 낸다고 했습니다. 급기야는 신앙이 없던 신랑이 함께 교회에 나가다가 그런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 소중한 주말에 몇 시간을 쓸 수는 없다고 교회에 가기를 거부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고 합니다. 올바른 복음을 전하고 실천하는 교회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더구나 한국을 대표하는 대형 교회들의 만연한 세습과 원로목사들의 막대한 전별금은 성도들에게 깊은 좌절감을 안겨주었습니다. 평생을 일터에서 수고한 직장인들도 그런 막대한 퇴직금을 받는 사례가 없습니다. 제가 섬기는 교회에도 사회적 상식에도 미치지 못하는 대형 교회의 모습에 실망한 많은 분들께서 옮겨 오셨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지역에서 누군가가 교회를 찾고자 할 때 자신 있게 추천을 해 줄 교회가 없다는 것이 우리의 자화상 같아서 매우 안타깝습니다. 저는 교회의 평판이 실추된 주된 책임이 삶에서의 신앙의 실천을 보이지 못하는 평신도들에게 있다고 보지 않습니다. 일차적으로는 가르치는 목회자들에게 더 큰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르치는 자는 본이 되어야 합니다. 제가 섬기는 교회의 담임 목사님께서는 복음을 두 가지로 설명하십니다. 말로써 선포되는 복음과 삶으로써 보이는 복음이 바로 그 두 가지입니다. 그동안 한국 교회는 보이는 복음에 대해서 너무 소홀하지 않았는가 생각합니다. 목회자들이 삶에서의 치열한 도전과 실천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도전과 실천이 설교에 묻어날 때, 설교에 힘이 있습니다. 목회자부터 말씀을 실천하는 본을 보이지 못한다면 성도들이 보이는 복음을 어디서 배울 수 있겠습니까?
교회에 대한 희망은 전도와 선교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선포하는 복음으로는 더 이상 사람들을 전도할 수는 없습니다. 삶에서의 실천을 통해서 보이는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저희 선교 단체의 한 후배는 여덟 가구가 함께 사는 다세대 주택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이 친구는 종종 커피를 내려서 이웃들에게 나누어주고는 하는데 이웃들도 이제는 이 친구가 커피를 내려서 나누어 주는 시간을 기다릴 만큼 꾸준히 그런 섬김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또 크고 작은 나눔 들이 이어지면서 여덟 가구가 현대 사회에서는 보기 드문 이웃 관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합니다. 최근에 한 젊은 부부가 이사를 왔는데 이웃들이 이 신혼부부를 위해서 바비큐를 준비해서 초대를 했다고 합니다. 신혼부부가 감동을 한 것은 물론입니다. 이런 섬김이 보이는 복음의 좋은 사례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올해부터 교회에서 새터민 섬김을 시작했는데, 최근 새터민 자매 한 명이 교회에 출석했습니다. 교회에서 자매를 알고 교제를 이어온 지는 오래되었지만 자매는 쉽사리 교회에 나오기 어려운 심리적, 사회적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 자매가 교회에 나오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어떤 집사님이 자매를 위해 준비해 준 새 원피스였습니다. 누가 입던 옷이 아닌 자신을 위해서 준비한 새 원피스를 선물 받은 자매가 교회가 정말로 자기를 기억해 주고 사랑해 준다는 것을 느꼈다고 합니다. 진정성 있는 섬김이 그 자매의 마음을 열게 한 것입니다. 이 자매가 교회에 나오면서 그 자매를 돕고자 하는 마음들이 연이어 이어지고 있습니다.
교회가 사람에 투자해야 합니다. 제가 섬기던 서울광염교회(일명 감자탕교회)가 도봉구에서 노원구로 이사를 갈 때에 도봉구청장께서 광염교회가 도봉구를 떠나게 되어서 너무 아쉽다고 인사하셨던 것이 기억납니다. 구청에서 돌보기 어려운 이웃을 발견하면 늘 교회에 연락하고 교회는 그분들을 진심으로 섬겼습니다. 교회가 건축을 위해서 모은 재정을 과감하게 청년들을 위해서 투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교회가 사람들을 키우고 사람들을 섬겨야 합니다. 그럴 때에 한국 교회가 회복되는 일이 시작될 것입니다. 일터에서 그리고 목양의 현장에서 제가 만난 한국교회의 성도들은 참으로 훌륭한 잠재력을 갖고 있습니다. 뛰어난 역량과 뜨거운 열정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잠재력이 전도와 선교로 이어지도록 이들을 깨워줄 리더가 필요합니다. 이러한 리더십이 나타나서 한국 교회의 잠재력을 일깨워 준다면 한국 교회는 쇠락해 가는 것이 아니라 다시 생명을 일깨우는 역동적인 교회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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