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복음과 행함이 함께 하지 않는 교회 생활은 공허할 뿐입니다:교회의 절망 속에서 교회의 희망을 꿈꾸는 박양우 대표
- 보현 전
- Nov 25,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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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안녕하십니까? 본인과 현재 하고 있는 일을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A: 광주비엔날레 대표를 맡고 있는 박양우라고 합니다. 광주 비엔날레는 세계 5대 비엔날레 중의 하나입니다. 현재, 2023년 4월 전시를 준비하고 있고, 그 다음 해 행사도 준비 중입니다. 제가 중앙대학교에서 짧지 않은 기간 교수로 재직하다가 작년에 은퇴하고, 지금은 다른 대학교에서 요청을 받아 강의도 하고 있고, 세계태권도연맹 부총재로도 일하고 있습니다. 이 외에 제가 많은 시간을 쓰고 있는 일은 신대원에서 공부하는 일입니다. 이제 3학년 마지막 학기를 거의 다 마쳤습니다.
Q: 박양우 대표님께서는 오랜 기간 공직자로서 일하시면서 문화체육관광부 차관을 거쳐서, 장관을 역임하시고, 또한 학자이자 교수로서도 적지 않은 시간을 일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공직에 계실 때, 종교와 문화를 주관하는 주무 장관으로서 일하기도 하셨는데, 사회에서 전문인으로서 오랫동안 활동해 오시면서 크리스천으로서의 정체성과 전문인으로서 일하는 것 사이에서 어떤 충돌이나 갈등을 경험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A: 정성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서 좀 다를 수 있겠습니다만, 제가 보는 정체성은 예수님을 구주로 스스로 고백하고 대외적으로도 고백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사회에서는 종으로 섬기면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함께 어우러지는 것이 바로 신앙인으로서의 정체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자신에 대해서 생각해 볼 때, 외부적인 어려움과 내부적인 어려움으로 구분해서 본다면, 외부적인 어려움은 그리 크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즉, 제가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는데 외부의 도전 때문에 혹은 어떤 상황 때문에 어려움을 겪은 일은 많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자면 제가 몸담았던 부처가 종교도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종교 단체에 갈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그곳에서 저의 신앙을 숨길 이유도 없는데, 요즘은 다른 종교 간에도 서로 존중해 주기 때문에 더더군다나 제가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숨길 이유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당당히 이야기해도 인정해주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또 지극히 작은 사례지만 직장 생활에서 고사를 지내는 일 같은 경우에도 제가 동참하지 아니하는 것에 대해서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자기 검열적인 의미에서 즉 교인이라는 것이 부끄러워지는 저와 교회의 모습 때문에 제 스스로의 내부적인 어려움이 더 컸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교회로서 또는 교인으로서 예수님의 향기를 발하지 못하는 모습들 때문에 자신을 돌아보게 되고 예수 믿는다고 하기가 좀 부끄러워지는 때가 있었습니다. 이런 부끄러움 때문에 자기 검열 혹은 내부로부터 오는 어려움이 오히려 더 큰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듭니다.
최근에 동성애 문제나 차별 금지법 등 교회에서 민감하게 생각하는 주제에 대해서 목사님들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저는 크리스천이기도 하지만, 종교를 담당하는 부처의 관료로서 일했기 때문에 이런 문제에 대해 공적인 자리에서도 제 의견을 명확하게 말하곤 합니다. 예를 들자면 기독교를 대표하는 단체 지도자들과 함께 대통령을 만나서 차담회나 식사를 나눌 기회를 마련하기도 하는데, 대통령께서도 자신의 개인적 견해를 말씀하시지만, 저 역시 그런 자리에서 나름의 근거를 갖고 저의 생각을 말씀드립니다. 개인적인 의견이라고 전제하고 말씀드리지만, 기독교 교인으로서 그리고 종교를 담당하는 주무 장관으로서 종교계에서 동성애 합법화 주장에 반대하는 의견들이 많으므로 이에 동의하기 어렵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물론 우리가 동성애 혹은 다른 주제와 관련되어 누구라도 품고 선대하는 것은 마땅한 태도이지만, 어떤 사안의 본질적인 부분을 이야기할 때에 그것이 대통령 앞이든 혹은 어떤 권위 앞에서도 믿고 있는 신앙에 기초한 신앙 정체성을 유지하고, 실행하는 데 있어서 주저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 개인적으로 그런 측면에서 외부적인 어려움은 크게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오히려 우리의 신앙이 열매로 나타나지 않아서, 다시 말하면 우리가 ‘예수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의 모습처럼 죽음으로써 사랑을 실천하고 사회에서 그것을 삶으로 보여주는 점이 부족한 데서 오는 개인적인 내부의 어려움이 더 큰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합니다.

(문화체육부 장관 재직 시, 사진제공 연합뉴스)
Q: 문화 전문가이기도 하시고, 이와 관련해서 외부에 강연이나 강의도 많이 하실 텐데, 문화 전문가의 관점에서 혹은 학자의 관점에서 한국 사회의 문화적 특징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A: 사회의 변화라는 것은 우리나라만의 특수함도 일부 있겠으나, 전 지구적인, 혹은 전 인류적인 보편적인 현상들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흔히 우리가 말하는 포스트 모더니즘과 같은 구조적인 문제 혹은 탈식민지 이론 등과 같은 요동치는 사상의 변화들, 특히 세속화의 문제, 디지털을 비롯한 기술의 발달에 따른 우리의 대응, 요즘에는 코로나 감염병과 같은 전지구적 감염병으로 인해 나타나는 주요 국가들의 사회적인 변화들이 한국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고 보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포스트 모더니즘 사회에서는 절대가치라는 것이 무시되어 버리고, 모든 것이 상대화되고, 개인화됩니다. 요즘 유튜브 콘텐츠 뿐만 아니라, 영향력이 큰 언론이나 텔레비전을 보면, ‘솔직함’을 강조하는 프로그램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솔직함’이 박수를 받고 있지만, 사실 그 안에는 ‘솔직함’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우리 인간의 탐욕이 도사리고 있기도 합니다. 이런 현상을 보면서, 우리 사회도 모든 것이 상대화되는 세상의 추세를 따르고 있고 또한, 이른바 사회를 지배하던 기독교 전통 또는 그 사상이 붕괴되고 완전히 다원화된 사회로 가고 있는 서구사회를 따라 가고 있지 않나 자문해 봅니다. 우리는 서구와 같은 기독교 사회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우리 사회 안에 나름 갖고 있던 교회의 권위가 많이 떨어지는 사회적 분위기, 특히 세속화 문제를 굉장히 주의 깊게 보고 있습니다. 또 포스트 모더니즘과 연결되지만 이 세상과 구별되어 거룩하게 되는 것 역시 상대화라는 이름 아래 누구나 다 똑같아져 버리는 그런 세상이 되지 않을까?라는 우려가 듭니다. 저는 이 같은 현상의 근본적인 원인이 물신주의 즉 맘몬이 우리 사회의 주인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그런 사회로 가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주목해야 할 또 다른 중요한 것이 바로 기술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우리는 인터넷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인터넷이 주는 편리함은 많습니다. 인터넷을 통해 다양한 콘텐츠를 볼 수 있습니다. 그 중에는 신앙적으로 좋은 설교 말씀이나 프로그램도 있습니다. 저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삶이 곧 문화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삶으로서의 문화가 구원받은 은혜로 비롯된 선함이 더 많은 것이냐 혹은 인간 본연의 죄악된 심성이 더 많이 표출되는 것인가를 봤을 때, 저는 후자가 압도적으로 더 강하게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상의 문화라고 할 수 있는 인간의 삶에 악한 경향이 더 강하다고 한다면, 그것을 콘텐츠 삼아서 보여주는 인터넷 또는 디지털로 대표되는 기술의 시대의 문화란 우리가 복음을 전파하고, 또 말씀을 접하도록 하는 선한 측면에서의 기회도 되지만, 그것보다 훨씬 더 많은 부정적인 측면이 두드러질 가능성이 높다고 보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적 시각에서 볼 때 디지털을 비롯한 기술의 발달로 전개되는 우리의 문화현상들을 장밋빛으로만 전망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가능하면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고자 하고 있지만, 기술 사회에서 우리의 신실한 심성을 견지하는 데 부정적인 영향이 훨씬 크다는 우려를 강하게 갖고 있습니다. 삼 십 년 전에 영국에서 유학할 때에, 당시 신학을 공부하러 오신 목사님들과 적그리스도에 관해서 토론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당시 그 적그리스도 또는 적그리스도적인 것을 든다면 인터넷과 기술 또는 그것과 관련된 것이 될 것이라고 얘기한 적이 있습니다. 현대 사회가 기술의 발달로 편리함 같은 장점도 있지만, 우리 인간 본성 자체가 그리고 그 본성을 반영하는 문화 자체가 반 복음적이고, 반 그리스도적인 성향이 훨씬 강하기 때문에 결국은 부정적인 콘텐츠가 그 확산되는 양이나 속도에서 월등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점에서 인터넷, 기술, 그리고 편리함의 시대를 매우 경계하면서 보고 있습니다.

Q: 인간의 편리를 추구하는 기술 사회가 포스트모더니즘 탓에 가치 상대화가 된 현대 사회와 만나면서 인간의 악한 본성이 여과 없이 추구되는 것을 우려해 주셨는데, 이런 사회에서 교회는 주님이 오시는 그날까지 이 땅에서의 삶을 살아내야 합니다. 현대 사회의 문화적 특징이 교회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다고 보시고, 이에 따라서 교회가 어떤 부분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A: 앞에서 말씀드린 현대 사회의 보편적인 변화가 영향을 주지만, 이런 변화들이 우리 사회와 교류하고 접목될 때에는 다른 사회와는 차이가 나는 현상도 있습니다. 제가 서양 사회를 정확히 분석해 보지는 않았지만, 우리나라는 상대적으로 샤머니즘이 수천 년 동안 이어오면서 기저에 미치는 영향이 있는데, 여기에 복음이 결합하면서 기복적인 성향이 강해진 것으로 보입니다. 기복적 기독교는 결국 배금주의(Mammonism)와 연결된다고 봅니다. 저는 기독교가 직면하고 있는 많은 과제가 있지만 우선 우리가 이것을 극복하고 기독교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교회가 기독교의 가르침에 대해서 정확하게 가르쳐 주면 좋겠습니다. 또 신행일치(新行一致) 문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로, 교인들과 교회가 작은 것이라도 열매로서 나타나는 모습들을 보여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이를 실천하는 일, 그것이 혼자서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공동체의 삶에 대해서 교회들이 더 많은 관심을 두고 고민하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교회들이 나서서 성도들이 이를 잘 실천할 수 있도록 북돋아 주면 좋겠습니다. 특히 대형화된 교회들의 경우, 큰 교회 안의 한 부분으로서의 구역 공동체들을 운영하고 있지만 진정한 의미의 공동체요 교회가 쉽지 않은 지금의 이런 교회 형태를 계속 유지하는 것이 좋은지, 아니면 좀 더 작은 교회로 나누어 교인 모두가 공동체다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지에 대해서 좀 진지하게 고민해 보면 좋겠습니다. 저는 후자 즉, 모두가 한 공동체를 이루는 것으로 가면 좋겠다는 견해입니다만, 신학적이거나 철학적인 접근이 아니라, 사십오 년 가량 교회 생활 곧, 예수 믿는 생활을 해오면서 지금의 대형교회 시스템이 너무 공허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여하튼 생활 속에서 하나라도 믿음으로 행해 보는 것에 의미를 두고 싶습니다. 그래서 교인들 스스로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런 기쁨을 갖고 사는구나, 또 밖에서 보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은 저렇게 멋있게 사는구나 하고 생각할 수 있도록 교회들이 이런 면을 더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Q: 현재 목회학 석사 과정 졸업 학기에 있다고 하셨는데, 신학을 공부하시게 된 계기는 무엇이고, 신학을 공부하시면서 어떤 유익을 느끼셨습니까?
A: 대학교 3학년이던 1979년도에 행정고시에 합격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전두환씨가 쿠데타를 통해서 군사정권을 세울 것이라는 이야기가 대학가에도 다 퍼져있었기 때문에 학교에서 연이어 시위가 일어나던 시기였습니다. 그러다 1980년에 광주민주화운동을 겪으면서 공직에 대한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독재 정부의 공무원으로서 일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회의감이 들었습니다. 제가 대학 3학년 때인 1979년도에 예수님을 영접하고 정말 뜨겁게 불타오르던 시기이기도 했고, 당시 전국적인 규모의 선교 대회들이 여의도 등지에서 진행되면서 이른바 젊은이들 사이에 신앙의 불길이 타오르던 시기였습니다. 그때 공무원이 아닌, 목회자가 되면 어떨까? 잠깐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담임 목사님께 여쭈어 봤는데, 제가 아니어도 목사가 될 사람은 수도 없이 많으니까, 그 어려운 시험에 합격해서 공직을 하게 되었으니, 하나님께서 그곳에 뜻이 있을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순종하는 마음으로 공직에 들어섰고, 그 뒤로 신학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공직에서 나름 열심히 일하다가 2008년 공직에서 물러나면서 뜨겁게 불타오르던 대학 시절의 신앙이 떠올랐고, 무늬는 그럴듯하게 교회에 다녔는데 돌아보니 너무 부끄러운 것이 많은 제 자신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무엇이 문제인가? 과연 나는 복음을 잘 알고 있는가? 깊이 고민하는 시간을 거쳤습니다. 그 후에 신학을 공부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평소 성경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시간을 내기 어려웠는데, 중앙대학교 교수로 가게 되면서 공무원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시간을 좀 더 유연하게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 시기를 놓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새로 시작한 교수의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서 교수로서의 안정에 필요한 시간을 보내고 2015년도에 신대원에 입학했습니다. 그 이후에 다시 공직에 부름을 받아서 잠시 그 일을 하다가 돌아와 2018년도에 다시 입학했습니다. 목회자가 되겠다는 확실한 소명을 받고 신대원에 간 것은 아니고, 제대로 신학을 공부해서 성경을 잘 알고 싶다는 마음이 가장 컸습니다.
막상 공부를 해보니 신학이 참 어렵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나이 들어서 공부하기도 어렵지만, 공부하면 할수록 신학 자체가 보통 어려운 학문이 아니라는 것을 느낍니다. 그래도 고시 공부 했던 경험이 있으니 신학 공부도 충분히 잘 감당할 수 있겠지 하는 좀 교만한 마음도 있던 것 같습니다만, 신학이라는 학문은 이전 공부하던 것들 하고는 전혀 차원이 다르게 공부하면 할수록 끝을 알 수 없이 어려운 것이라는 것을 느끼면서 1학년, 2학년 때는 무력감도 많이 느꼈습니다. 지금도 그 무력감을 갖고 있지만, 마지막 학기를 맞이하니 한편으로는 체념하는 마음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 같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이지만, 학문에도 무슨 끝이 있겠는가 싶고 가장 기초적인 부분을 아는 것으로도 제겐 족하다는 생각을 갖습니다. 부족한 대로 배웠던 틀을 갖고서 스스로 성경을 공부하고, 또 적용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도 3년의 과정이 제게는 정말 유익했습니다. 신학에 관해서는 아직 초보 중의 초보이지만 저에게 주어진 시간, 특히 나이가 들다 보니, 제가 일하고 있는 이 일, 장소 또 만나는 사람 이 모든 것이 너무 귀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모든 것이 너무 아까울 만큼 귀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죄악 된 세상에 손수 내려오셨던 그 절박함, 그것의 억만 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겠지만 그 마음이 조금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제가 가질 수 있는 시간, 사람, 공간, 이 모든 것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지금 일하고 있는 직장이 제게는 선교지 같고, 아침에 출근해서 직원 한 영혼, 한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면서 이 일 자체가 하나님께서 종으로 섬기라고 보내신 자리라고 생각하고 스스로 예수의 종으로서 섬기는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일터가 곧 종 된 자로서의 자유와 기쁨을 누려야 하는 장소로 여겨집니다. 더 바라는 것은, 함께 일하는 동료들이 ‘예수 믿는 사람은 이렇구나!’ 라고 말하는 모습을 보고 싶고, 그런 기대를 갖고 일하고 있는 일터가 바로 제 선교지인 셈입니다. 만약 선교지인 직장에서조차 ‘저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 맞아?’ 이런 이야기를 듣는다면 사실 교인으로서도 너무 부끄러운 일이고, 혹시라도 하나님께서 소명을 주신다고 해도 목회자가 돼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일상에서의 이런 감사와 선교의 의미를 깨닫게 된 것이 바로 신대원에서 삼 년 동안 공부하면서 배운 것들의 영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광주 비엔날레 대표이사 간담회: 사진 광주 비엔날레 홈페이지 제공)
Q: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리에서 소명을 인식하고 또 그 소명을 이루기 위해서 노력하시는 모습이신데, 교회 공동체가 그런 결심이나 변화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궁금합니다.
A: 사실 제가 공직 생활 중에는 기독교인으로서 주어진 소명의식을 크게 느끼지는 못했습니다.그저 공무원으로서 충실하게 일하자는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공직을 마치고 나올 때에 너무 많은 후회가 남았습니다. 제 공직 생활을 돌이켜 보면, 하나님께서 옅은 믿음이지만, 그 믿음대로 인도하셨다고 믿고 감사를 드립니다. 하지만, 제가 어떤 소명을 느끼고 했던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저의 신앙 초기에는 참 열혈 신자처럼 살고자 했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군대에서든 어디에서든 그렇게 살려고 애쓴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직장 생활에서는 그냥 직장의 일에 충실했다는 정도였습니다. 물론 교회의 소모임이나 설교를 통해서 직장이나 평상의 삶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았을 수는 있겠지만, 소명을 발견하는 데 있어서 직접적인 영향은 크지 않았다고 보입니다. 이렇게 진단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교회 생활이 주일 예배에 가서 설교 말씀 잘 듣고, 또 순 모임에서 주어진 공과 말씀을 나누고 교회 봉사활동 같은 것을 하는 것이었지, 공동체 생활로서 함께 하는 것은 거의 드물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뒤늦게 보니, 직장이나 일터에서 어떻게 해야 한다. 또는 가정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 것에 대한 교회 프로그램도 상당히 있었던 것 같은데, 적극 권유 받거나, 당시 개인적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이것들을 배우지 못해 교회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았다고 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설사 교회에서 권유하지 않았어도, 좋은 프로그램들이 있으니 참여했다면 좋았을 텐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 많이 아쉽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는 교회가 제 소명을 발견하는데 있어서 많은 영향을 주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요즘 교회가 혹시 도와줄 수 있다면, 주일학교나 청·장년의 때에 예를 들어 인생의 가치관이나 직업관 또는 가정에 대해서, 그리고 장년은 장년으로서 이런 것들에 대해서 교회에서 좀 더 관심을 두고 교육도 하고 이것을 공동체적인 삶으로 연결해주는 훈련도 같이 하는 역할을 해주었다면 참 좋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Q: 최근 교회의 공적 역할에 대한 강조도 많이 보입니다. 사회와 교회의 리더로서, 또 목회를 공부하시는 신학도의 입장에서 교회의 공공성의 측면에서 한국 교회가 고민해야 하는 점들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A: 저는 지금도 교회들이 공공성 측면에서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교회 현실에서 교회 역시 세상의 이분법적인 편 가름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사실 복음은 진보와 보수 모두를 초월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복음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역시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 둘이 하나로 녹여져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개념을 둘로 구분해서 보려는 경향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한국 사회는 정치 이데올로기가 복음보다도 위에 있는 특이한 현상, 심지어는 교회 안에도 그것이 들어와서 교회도 복음이 아니라, 정치 이데올로기에 따라 분열된 것 같은 모습에 굉장한 슬픔을 느낍니다. 저도 젊을 때에는 복음이 우선인지 다른 무엇이 더 우선인지에 대해 고민하기도 했습니다. 교만하고 건방지게 들릴 수도 있지만, 나이가 육십이 넘어가니 그 이야기들이 무슨 대단한 의미가 있는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복음이란 양보할 수 없는 것으로 기본적으로 우리의 바탕에 깔려 있어야 하는 것이고, 그 다음에 우리가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서 그 열매를 맺는 것, 그것이 없으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복음에 기초를 두는 것을 우선해야 한다거나, 공공적인 것을 우선해야 한다거나 하는 논쟁이 신학 내에서 학문적으로는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신앙을 갖고 살아가는 데에는 큰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 복음은 당연히 기본적으로 최우선으로 갖추어야 합니다. 그러나 행함 역시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이 주제를 연구하시는 신학자들께는 대단히 죄송한 말씀이지만, 저는 이 두 가지를 우선순위를 두어서 분리하는 것 자체가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복음을 강조하시는 분 중에 에큐메니칼 운동 자체를 너무 비하하시는 분들도 보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분들의 주장이 실제로 복음적인가를 살펴볼 때, 교리적일 뿐 실제로 그렇게 복음적이지 못한 모습도 보입니다. 이런 논쟁이 아무 의미가 없다고 일축할 수는 없겠지만, 학문을 위한 학문, 교리를 위한 교리에 대한 논의에 너무 많은 시간을 쏟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학문적으로 혹시 논쟁이 된다고 할지라도, 복음에 기초한 것이라면, 저는 사회에 눈을 돌려서 그들과 함께 하고, 사회에 관심을 두고 소외된 이웃을 돕고, 제도를 고쳐 나가는 것이 우리 크리스천들이 기본적으로 해야 하는 일이고, 교회들이 관심을 두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관심을 두는 정도가 아니라, 강조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보수적인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또 이런 배경을 보고, 저를 재단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복음이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고, 예수를 믿고 예수가 제일인 것은 누구나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를 보면 혀로는 이렇게 말하는데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면 너무 삶이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제 자신도 실망스럽지만, 세상 사람들도 우리, 아니 저를 조롱거리로 보고 있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것을 알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저를 포함해서 우리 모습을 보고 누가 예수 믿는 제자라고 하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어떤 이데올로기적인 측면이 아니고 복음의 하나로서 또한 복음의 전부로서 공공적인 측면, 공공적인 교회의 역할은 복음과 동떨어진 둘이 아니라 하나라고 보고 싶습니다.

Q: 인터뷰를 보시는 분들과 어떤 말씀을 나누고 싶으십니까?
A: 보시는 분 중에 예수님을 참 구주로 고백하시는 신앙의 동지들께는 작은 것 하나라도 실천하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저도 잘 못하고 있지만 잘 하기 위해 고민하는 것이니까 여러분도 함께 고민해 주시고, 정말로 신앙인으로서의 위치를 지키는 삶을 사시면 좋겠습니다. 거창한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것이라도 실행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혹시 믿음이 없는 분들이시라면, 우선 대단히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정말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저부터도 본이 되지 못하고, 우리 교회들이 참 저 사람들 보면 예수 믿고 싶다는 마음을 갖지 못하게 했다면 더 죄송합니다. 만약 관심이 없는 분들이시라면, 예수 믿는 사람들이 교회가 이렇게 좋은 곳이고, 그래서 사람들이 교회로 오고 싶도록 해야 하는데 이것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대단히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그러나 변명하자면 사실 저나 혹시 부족한 우리 교회가 예수님이 아니고, 바로 저나 부족한 교회들이 온전하게 되기 위해서 예수님을 찾고 있는 것이라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부족한 자들을 온전하게 하기 위해서 오신 분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지 않는 분이시라면 예수님을 한 번 알아보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또 하실 수만 있으시다면, 좋은 기독교 공동체, 그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기회를 꼭 가지시면 좋겠다는 당부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Q: 지금 한국 교회를 보시면서 가장 안타깝게 여겨지시는 점은 무엇이신지 그럼에도 희망은 어디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A: 교회 전문가가 아닌, 평신도로서 말씀드린다면, 95%의 비관과 5%의 낙관이라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계속 교인 수가 줄어들고 앞으로도 이런 추세는 계속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망해가고 있는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희망을 봅니다. 철저하게 깨지지 아니하면, 우리는 소생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지만 새로 만든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어서는 다 터지고 말 것입니다. 새로 만든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지금의 문제를 임기응변이나 대증요법으로 대처할 수 있는 시기는 지났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신학 공부도 짧고 교회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하지만, 사회 현상을 같이 고민하는 처지에서 또 한 편으로는 대학 강단에 있는 교수의 관점에서 봤을 때, 교회가 철저하게 망하지 않고서는 소생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가 철저히 망하지 않으면 한국 교회는 큰 희망의 빛을 보기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정말 철저하게 좀 망해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거기서 새로운 출발을 다시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 교회가 망해가는 것이 슬프지만 그래도 사실 기대를 하면서 지켜보고 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최근 그런 모습들이 조금씩 보입니다.
교회의 대형화 그리고 대형교회의 프랜차이즈화에 대해서 긍정적인 면도 있고, 부정적인 면도 있겠지만, 오히려 요즈음은 작은 공동체들이 생겨 예수의 삶을 실제로 살고 싶어하고 실천하려는 그런 모습들이 좀 보이는 것 같고, 또 큰 교회들도 분립하면서 마을과 지역에 깊이 뿌리를 내리는 그런 교회들이 교인들의 공동체로서 함께 하는 모습들을 조금씩이나마 볼 수 있어서, 비록 5% 아니 어쩌면 그보다 적은 가능성이 있을 뿐이라서, 우리는 이런 가능성으로는 문제를 바로 잡을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하나님이시라면 그 가능성을 능히 키워 주시지 않을까 그래서 그 가능성 속에 우리 한국 교회의 희망이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변화가 오 년 혹은 십 년 안에는 어려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몇 년이 걸릴지는 모르지만, 그 싹이 트이고 있으니까 그것을 잘 지켜보고 저도 할 수 있다면 한 부분에서 동참하고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결국은 하나님께서 한국교회를 능히 살리시지 않겠습니까? 이런 힘든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참 슬프기도 하지만, 한 편으로는 하나님께서 한국 교회를 어떻게 만들어 가실지를 기대하는 설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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