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교회도 개인도 하나님이 주신 사명에서 시작해야 합니다:사명을 따라 살아가는 지속가능성 전문가 안정권 성도
- 보현 전
- Sep 30, 2022
- 23 min read

Q: 본인과 하시는 일에 관해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A: 안녕하세요? 기업에서 지속가능성 책임자(Chief Sustainability Officer)로 일하고 있는 안정권이라고 합니다. 현재는 사회적인 미션을 갖고 설립한 회사에서 회사가 단기적인 이윤 추구에만 매몰되지 않고 중장기적으로 사회적인 미션을 향해 가도록 하고, 또한 조직의 경영에서도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이해관계들을 수단으로 생각하지 않고 존중받는 주체로서 기능할 수 있는 방식을 고민하면서 친환경적인 경영을 추구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최근 ESG*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기업에서도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직책들이 많이 생기고 있습니다. 지속가능성 개념의 중요성을 먼저 발견한 해외 기업에서 ESG를 책임지는 직책들이 많이 생겨났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지속가능성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회사들이 늘어나고 있어서 반갑게 생각합니다. 흔히 지속가능성이라는 개념을 회사가 영속할 수 있도록 충분한 재무적 이익을 창출하는 것으로 생각하시기도 하는데, 원래 지속가능성은 기업의 단기적인 영리 추구에 대한 반성적 태도에서 나온 개념입니다. 기업이 속해있는 사회와 지구가 지속 가능하도록 고민하면서 기업을 경영하는 방식을 지속 가능 경영이라고 합니다. 저 역시 현재 기업에서 사회를 더 지속 가능하게 하는 경영을 맡고 있고, 개인적으로는 사회적 미션을 가진 기업 중, 좀 더 건강하게 조직을 운영하고 싶어 하는 기업들을 돕는 일도 하고 있습니다. 민간 연구소에서 지속가능성과 CSR 분야에 대해 연구를 해오던 중 실제 기업 내부에서 이런 역할에 대해 고민하던 창업자들과 만나면서 현재기업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ESG: Environment Social and Governance의 앞 글자를 딴 용어. 현대 경영에서 기업의 지속가능성을 구성하는 요소들로 기업의 목적을 주주 중심의 재무적 이익을 창출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관점에서 벗어나서 사회, 환경 등 더 넓은 이해관계자의 가치 창출을 강조하는 관점
Q: 사회생활을 준비하시던 처음부터 지속가능성이라는 주제에 대해서 고민하셨던 것 같습니다. 어떻게 이 주제에 관해 관심을 두게 되셨습니까?
A: 이 질문에 답을 드리려면 제 신앙에 대한 말씀부터 드려야 할 듯합니다. 저는 대학교에서 경영학을 전공했습니다. 사실은 전공을 선택할 때, 별생각이 없었는데, 남들 보기에 좋은 과이고 부모님도 권하시던 전공이라 별 고민 없이 선택했습니다. 경영학에서 요구하는 시스템적 사고나 전략적 접근 부분은 개인적인 성향과 잘 맞았지만, 경영학을 공부하면서 떨칠 수 없는 의문이 하나 있었습니다. 제가 공부하던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경영학에서는 기업의 목적은 이윤극대화 또는 주주 이익 극대화라고 가르쳤습니다. 이런 전제에서 1학년부터 4학년까지 기업 경영과 관련한 공부를 하는데 저는 그 기본 가정에 대해 계속 의문을 품고 있었습니다. 제가 대학교에 다닐 때, 성경 공부, 기도 모임, 독서 모임 등 기독교와 관련된 활동을 나름 열심히 했는데, 제가 경영학의 기본 전제에 의문을 품게 된 것은 이 활동과 관련이 있습니다. 특히, 성경 공부를 하면서 환경이라는 주제와 성경의 희년정신(禧年精神)에 대해서 깊이 있는 관심을 두게 되었습니다. 희년 사상과 관련해서 직접적으로는 레위기 25장을 찾아볼 수 있지만, 사실 희년의 정신은 성경의 전체적인 맥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가복음에서 선언하신 것과 같이 희년이 실천되는 성경의 장면들을 공부하면서 희년이 성경을 관통하는 커다란 주제, 즉 하나님의 뜻이자 관점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희년에 대한 관점은 저의 세계관이 형성되는데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제가 이해한 희년정신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을 하나님이 피조물들이 함께 누리도록 베푸시는 것, 각자가 수고하고 땀 흘린 것만큼 각자가 가지고 가는 것, 그리고 소외되고 억눌린 자에게 자유를 선포하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희년에 관해 관심을 가진 혈기 왕성한 청년이 현대 자본주의 사상에 기초한 기업의 목적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은 당연하다고도 생각됩니다. 성경에 기록된 돈에 대한 관점은 중립적이지만 기만적입니다. 중립적이지만 기만적이라는 것은 돈은 어떻게 활용되는가에 따라서 사람을 살리기도 혹은 죽이기도 하는데, 돈 자체가 목적이 되는 순간에는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는 돈의 진정한 사용 목적이 종종 맥락에서 지워지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입각한 가치에 근거해서 생각해 볼 때, 가치 중립적인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진정한 기업의 목적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해 당연히 질문이 생길 수밖에 없었니다.
그래서 스스로 이런 부분에 대한 정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적어도 제가 믿는 하나님과 성경의 관점에서 학교에서 가르치는 기업의 목적이 타당하다고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희년 정신의 관점에서 볼 때,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드러나는 사회, 환경적인 문제들이 그럴 수도 있다고 넘길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대안을 찾아야겠다는 고민을 깊이 하면서 대학교 4년을 보냈고, 경영학이 아닌 다른 분야를 공부하면서 길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정리해서 말씀드리면 대학에서 깊이 고민한 희년 정신을 사회에서 실천해 내고자 했지만, 제가 전공한 경영학이 비록 제 개인적 성향과는 잘 맞았음에도 성경의 지향점과 거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고민 끝의 지속가능성이라는 개념에서 대안의 가능성을 찾았다고 설명해 드릴 수 있습니다.
Q: 대학교 1학년생이 그런 질문을 던진다는 게 예사로운 일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어떤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내셨기에 그렇게 신앙에 중심을 둔 시각을 갖게 되셨을까요?
A: 사실 저는 신앙생활을 모범적으로 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는 학생이었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깊이 만날 수 있던 계기들이 있었습니다. 제가 어릴 때 소위 나쁜 버릇이 있는친구들과 어울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도 나쁜 짓을 많이 했습니다. 부모님 돈을 몰래 훔쳐 가는 일은 예사였던 불량소년이었습니다. 부모님이 한 2~3년 정도는 아주 말없이 참아주셨습니다. 그날도 부모님 돈을 몰래 가지고 가서 신나게 놀고 돌아왔는데 어머니께서 기다리고 계시다가 제게 앉으라고 하셨습니다. 긴 대나무와 칼을 가져오셔서는 대나무가 부러질 때까지 맞고 다 같이 하나님 앞에서 죽자고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장로셨고 어머니는 권사셨습니다. 두 분이 몇 년 동안 하나님 앞에서 저를 두고 기도해 오셨는데, 이제는 하나님 앞에서 또 성도들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때 제 잘못과 제 안에 있는 죄에 대해서 분명히 인식시켜 주셨고, 그 결과로 이제 같이 죽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일이 제게 상당히 깊이 각인이 되었습니다. 제가 교회를 빠지지 않고 출석은 했지만, 모범생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아주 모범생처럼 살았다면 이렇게 깊이 각인되는 회심의 기회나 제 존재가 하나님 앞에 세워지는 경험을 하지는 못했을 것 같습니다. 부모님께서 칼을 제 앞에 꺼내 놓으시고 같이 죽자고 말씀하셨던 그 선명한 사건이 제게 그런 경험이 되었습니다. 한 두세 시간을 운 다음에 몇 년 동안을 지속했던 나쁜 습관들을 하루아침에 끊어낼 정도로 제 잘못을 깊이 깨닫게 된 계기였습니다. 그런데, 더 인상적인 것이 어머니 아버지께서 그로부터 며칠 지나서 있었던 가정 예배에서 이제 하나님 아버지가 다 용서하셨고, 아빠 엄마도 다 용서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들어도 제 마음에는 그 말씀이 진정으로 믿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아… 그래도 내가 엄마 아빠 것도 훔치고 불량한 짓을 몇 년을 계속했는데, 그걸 그냥 다 잊으셨다고? 다 용서하셨다고?” 말씀은 그렇게 하셨지만, 제 마음에는 그런 자신에 대한 정죄감과 의심이 남았습니다. 만약 집에서 무엇인가가 없어지면 나를 의심하지 않으실까 하는 그런 불안감이었습니다. 그런 상태로 2~3년을 지냈는데, 교회 또래 친구들과 그 부모님들이 함께 모여서 놀던 중이었는데, 어른들 이야기가 옆으로 새어들리는 그런 때가 있잖습니까? 서로 자식 자랑을 하는 이야기가 조금씩 들렸습니다. 제가 동네에서 공부를 조금 하는 편이라, 저희 어머니가 제가 공부를 잘하는 걸 말씀하실 줄 알았는데, 우리 아들은 ‘남의 물건에 손을 대본 적이 없을 정도로 반듯한 아이다'라고 자랑을 하셨습니다. 제게는 그 말씀이 그냥 제 과거의 잘못을 잊어버리셔서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정말 제 과거를 진심으로 깨끗하게 용서하신 그 상태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들렸습니다. 제가 부모님 지갑에 손을 댄 적이 없다는 이야기가 그 사실관계 여부를 떠나 저를 완전히 새롭게 바라봐주시고 온전히 신뢰해 주시는 것을 강하게 체감할 수 있는 말씀으로 들렸습니다. 그때 기독교의 용서라는 것이 이렇게 정체성이 완전히 옮겨지는 지경에 이르는 것임을 깊이 배웠습니다. 당시에 제가 신앙이 깊어서가 아니라, 그냥 성경을 많이 알고 싶어서 성경을 읽고 있었는데, 미가서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신다(미가 7:19)’는 말씀을 읽었습니다. 우리가 찾을 수도 없게 말입니다. 그때 ‘용서라는 게 진짜 이런 거구나’를 깨달았습니다. 우리가 빛의 자녀로 완전히 옮겨졌다는 뜻이 비록 우리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해서 죄로 신음할 수 있지만, 그런데도 완벽한 용서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이미 그러나 아직 (Already, Not yet)의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것을 선포하신 예수님 말씀의 의미도 많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중3 때 부모님으로부터 용서에 대한 신앙적인 의미를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용서를 받았다는 것이 ‘더 이상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용서해 주신 분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새로운 힘을 받는다.’는 의미로 이해가 되었습니다.
또 하나의 인상적인 계기는 제가 성년이 되었을 때입니다. 저희 아버지께서 제가 성년이 되었을 때, “아들아, 다른 집처럼 성년을 맞은 너에게 대단한 물질적인 선물은 없다. 대신 내가 성년이 된 아들에게 이야기해 주기 위해서 그동안 해 온 것이 있다. 아버지는 네가 태어난 날부터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매일 새벽에 네가 이 시대의 나실인으로 살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 왔다. 이제 성년이 된 만큼, 아버지의 서원을 선물로 이어받아 이제는 스스로 이 시대의 나실인으로서 살아가기를 소망하면 좋겠다. 다른 것은 네가 알아서 나실인의 정체성을 고민하되, 하나는 약속해라 살면서 평생 술을 마시지 말았으면 좋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 현대 사회에서 그렇게 사는게 쉽지 않겠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 요청을 하시는 아버지가 매우 진지하게 힘을 주어 그 말씀을 하셨고, 시골 교회의 장로로서 본이 되는 모습을 보여주신 아버지에 대해 평소 반감이 아닌, 존경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나실인의 삶에 대해 고민하면서 살아가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가볍게 들을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진지한 부탁이 마음에 계속 남아서 성경에 나온 나실인들의 삶을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삼손, 사무엘, 세례 요한을 찾아보면서 나실인이 결국 거룩하게 구별된 자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 혼자 구별된다는 그런 느낌보다는, 이 세대에서 하나님의 뜻으로 거룩해지는 것이 중요하고, 나도 그런 삶을 살아고 싶다는 생각이 제 신앙 깊은 곳에 뿌리내리게 된 것 같습니다. 중학교 때 부모님의 전적인 용서를 경험하면서 죄의 싹을 품고 있는 ‘죄의 종’에서 ‘빛의 자녀’로 옮겨졌다는 개념을 깊이 깨닫고, 두 번째로 아버지께서 강조하셨던 나실인으로 산다는 것을 현대적으로 해석하기 위해 고민하면서 신앙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자리 잡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대학 때 유행하던 성경적 세계관의 개념을 접하면서 거룩한 삶이 게토화되어서 세상과 분리되는 이원론적인 접근이 아니라 일원론적으로 세상 안에서 살아 내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되었고 이런 생각들이 이어지면서 가랑비에 옷 젖듯이 제 정체성이 세워진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삶의 방향을 고민하는 대학 시기에 희년을 현대 사회에 실천하는 방법에 대해 깊이 생각하다 보니, 이 주제가 내 인생을 관통하는 하나님의 뜻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사명을 "희년을 선포하는 삶을 살자."고 다짐을 했습니다. 당시에는 레위기 25장과 희년 정신을 토대로 고 대천덕 신부님이 만드셨던 성경적 토지정의 모임(성토모, 현재 희년함께)이 활발했는데, 저 역시 그 단체에서 간사도 하면서 희년 정신에 기반한 토지 정의 운동에 적극 참여했습니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소명의식을 가지고 성토모 활동을 하시는 분들을 보며, 나는 토지정의에 관한 관심과 적성이 저렇게 까지는 확고하지는 못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성토모의 연구자와 활동가들은 부동산 문제와 불평등 같은 부조리한 문제를 예리하게 파악해 내고 이에 대해 끈질기게 연구하셨는데 그 모습들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다만 저는 그렇게 연구하는 건 적성에 맞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웃음) 하지만, 계속해서 '희년을 선포하는 삶'을 인생의 사명으로 삼고 나아가다 보니 비즈니스 영역에서 사람을 대하고, 조직을 운영하는 부분에 제 관심이 쏠렸습니다. 레위기 25장 24절 앞 부분이 땅에 대한 이야기라면 뒷 부분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을 종으로 여기지 말고, 나그네이자 함께 거주하는 사람으로 환대하라는 그런 말씀을 묵상하며, 내가 이 시대에서 사람들이 이윤의 도구로 전락하고 일에 종속되기 쉬운 비즈니스 영역에서 희년의 자유를 선포하는 삶을 살고 싶다는 사명의식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제가배웠던 경영학의 전통적인 가르침과는 다른 더 나은 경영, 더 나은 비즈니스를 희년의 정신으로 실천해 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대학 때 피상적으로 희년을 선포하자는 생각이 대학원 과정에서 비즈니스에서 희년을 선포하는 삶으로보다 구체화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제 사명을 추구하다 보니 대기업이나 금융계처럼 흔히 말하는 좋은 직장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물론 당시는 제가 추구하는 가치를 기반으로 비즈니스를 하는 기업이나 조직을 찾기도 어려웠고, 관련된 좋은 일자리도 많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제게는 사명과 이어진 일이다 보니 처음부터 계속 이 주제를 다루는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Q: 그 이후에 본격적으로 지속 가능 경영이라는 키워드를 고민하게 되신 것 같습니다. 지속 가능 경영을 처음 접하시게 된 것은 어떤 과정을 통해서였습니까?
A: 대학원에서 지속 가능 경영을 공부하려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자본주의 또는 기업의 자본주의적 이윤추구에 대해 성경적 관점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대안을 고민하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다짐이 있었는데, 이러한 삶을 살아내려면 무엇을 더 알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대학원에서 답을 찾고 싶었습니다. 그간의 삶을 돌아봤을 때,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대학에서 성경 공부 등을 통해서 기본적인 내용을 정립했고, 이를 바탕으로 교회 생활을 통해서 그 내용을 유지하고 발전시킬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제가 직업적으로 신학을 할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교회 생활로도 충분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또한, 나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 즉 그리스도인으로 어떻게 주변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야 할지에 대해서도 교회 공동체와 사회참여적인 기독교 관점을 통해서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 세계와 나의 관계에 대해서는 하나도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두 가지 관계, 즉 하나님과 나의 관계 그리고 나와 이웃의 관계는 어느 정도 이해를 하였지만, 세 번째 관계라고 할 수 있는 나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와의 관계는 더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경영대학 졸업 후 군대를 다녀와서는 환경 대학원이라는 곳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환경 대학원은 환경과 지구생태계에 대해 배우고 연구하는 곳입니다. 환경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신앙적으로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창조 세계를 보호하는 것과 또 인간이 이 창조 세계와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에 관해 공부를 하고 싶어서, 생태 신학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환경과 관련된 공부를 하면서 가장 유익했던 것은 진정성을 가지고 환경을 보호하려고 하고 사회적으로도 가치 있는 사명을 추구하는 비즈니스의 사례들을 많이 접하게 된 것입니다. 이 사례들을 접하고 나서 저의 관심 영역이 하나로 접목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공부를 계속하면서 환경 생태에 대해서도 더 깊이 알게 되고, 하나님께서 이 피조 세계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도 깨닫게 되었고, 그다음으로 하나님께서 피조 세계 위에서 또 각각의 사람들이 착취와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고 소외되지 않는 구조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시는지도 깨달았습니다. 경영학에서 요구하는 분석적인 능력이나 구조적인 사고에 개인적인 강점이 있었는데, 이런 강점을 내가 지향하는 가치관에 맞는 방식으로 적용할 수 있는 것 같아서 더 흥미가 있었습니다. 원래는 경영학에 반하는 반자본의 삶을 구체화하고자 대학원에 왔는데 대학원에서 홍보용이 아니라 진정성 있게 지속 가능성이라는 개념을 추구하는 의미있는 흐름을 알게 된 이후부터 이 분야에서 제 경력을 쌓아야겠다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이 분야에서 첫 직장 생활을 시작하면서, 이 일들을 잘해 나갈 수 있도록 문제해결을 위한 기술이나 역량 그리고 지식과 실무적인 실력을 열심히 쌓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는 이런 주제에 관심을 두는 곳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소수의 연구소를 중심으로 집에서 가장 가까운 순서대로 차례대로 지원했는데, 감사하게도 거의 초반에 지원한 곳에서 기회를 주셔서 저의 사상이나 사명에 기초해서 인생의 방향을 정한 영역에서 전문성을 기르기 위한 배움의 시기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Q: 흔히 어른들은 청년들에게 하고 싶은 것에 도전하라고 말씀하시지만, 이 이야기를 실천해야 하는 청년들에게는 많은 고민이 생기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해주신 이야기가 청년들에게는 도전의 이야기처럼 들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런 도전의 순간에 고민이 되지 않으셨습니까? 아마 졸업하시고 대기업에 취업하셨을 때의 기대 가능한 소득이 예상되셨을 것 같고, 연구원이라는 직업도 계속 학업을 지속해서 박사를 마쳐야, 더 높은 수준의 직무에 도전해 볼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부분에 대한 고민 없이 경력을 시작하신 것인지 궁금합니다.
A: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저는 별로 고민이 없었습니다. 제가 사회적 기업가를 꿈꾸는 대학생들 또는 사회 초년생 중 기독교 신앙이 있는 분들에게 가끔 강의나 자문도 하고 있습니다. 이 청년들에게도 같은 질문을 받으면 비슷하게 이야기 합니다. 흔히 진로나 비전에 관해 힘들고 고민될 때 믿음으로 하나님의 길을 선택하면 하나님이 선하게 인도하시고 축복하신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시기도 하고 듣기도 하실 텐데, 저는 그런 기대를 하지 않는 편에 가깝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나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 그리고 내 삶을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명에 대해서는 깊이 그리고 오래 고민해왔지만, 정작 진로를 선택할 때는 하나님의 뜻을 깊이 고민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소명이라는 책을 쓴 오스 기니스의 견해도 그렇고, 제가 이해하는 개념에서의 소명이란 직업적인 진로의 개념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 선후 관계를 분명하게 해보면, 저는 제 진로에 관한 결정보다 말씀과 기도, 하나님 앞에서의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 자녀로서의 정체성, 그리고 제 삶의 목적의식과 방향성이 먼저 세워졌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삶을 통해서 무엇을 원하시는가를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궁금해서 시작한 것이지만, 대학에서 성경과 말씀을 연구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정작 전공과 관련한 학업 성적이 그렇게 좋지 않습니다. 이것도 바람직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결과적으로는 그 시간을 통해서 희년을 선포하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저 자신의 사명 의식이 굉장히 견고하게 자리를 잡은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진로에 대한 고민은 거의 없었습니다. 어떤 진로나 사회적 지위도 결국은 내가 받은 사명을 이루는 과정에 불과하고, 하나님이 무슨 직장을 다니기를 원하시는지를 묻는 것은 오히려 내가 고민해야 할 책임을 떠넘기고 숨는 모습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현실적인 작은 고민도 있었지만, 오히려 그런 고민들을 빨리 정리하고 이 사회에 하나님의 나라의 어떤 모습이 드러나도록 하고 싶다는 생각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강의에서도 제가 말씀드리는 내용이지만, 결국 진로보다 앞선 것이 있는 것 같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하나님의 부르심과 관련해서 우리가 교회 안에서만 사는 것이 아니라면, 결국 월화수목금을 다 세상에서 살아내기 때문에 여기서 무엇을 할지에 대한 고민 즉 진로만으로는 우리가 겪는 총체적인 삶에 대해 성경적인 가치 판단을 내리기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공교롭게도 대학 시절에 진로보다 더 근본적인 개념인 사명과 소명을 찾을 수 있었기 때문에 진로에 대한 고민이 적었던 것 같습니다. 전통적으로 진로에 근거를 둔 사명의 이해는 보내신 곳에서 충성하라는 권면과 함께 구체화합니다. 하나님이 보내셨기 때문에 입사한 곳에서 내보내기 전까지는 스스로 그만두면 안 되는 것처럼 말씀하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저는 이직이 좀 많은 편입니다. 직장 자체가 목적이었다면 여기서 내가 승진하거나 연봉이 오르면 더 좋겠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직 중에 소위 신의 직장으로 불릴 만한 곳에서 근무하기도 했는데, 이곳에서 평가를 좋게 받아서 중요한 다른 역할을 맡게된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저에게는 제가 사명으로 하는 지속 가능성과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는 일과 무관한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그 변화가 저의 사명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으로 느껴졌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인정받았다고 부러워하기도 했지만, 저는 원래 하던 지속 가능성 관련 업무로 복귀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결국은 이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그곳을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만약 사명이 명확하지 않았다면 사회적 지위나 연봉에 따라서 저도 흔들렸을 수도 있을 듯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게, 연봉이 아니라 사명을 쫓다 보니까, 연봉은 오르기도 하고, 낮아지기도 했습니다. 몇천만 원이 올라서 이직하기도 했지만, 또 몇천만 원을 낮춰서 이직하기도 했습니다만, 이런 변동이 제게는 그렇게 큰 영향을 주지는 않았습니다. 왜 그랬는지 생각해 보면 직업이나 진로 이런 것보다는 기본적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체성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고 확신한 사명 의식이 강하게 형성이 되어 있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Q: 그러한 사명 의식은 단지 직업적으로 교회사역을 하시는 목사님들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에게 필요한 부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말씀해 주신 사명 의식에 나실인으로서의 본인의 정체성이 어떤 영향을 미쳤습니까?
A: 네 말씀하신 대로 나실인이라는 정체성이 제 사명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엄청나게 깨끗한 삶을 살았다고는 말씀드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스스로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볼 때 못난 모습을 수없이 보기도 했고, 하나님이 없으시면 정말 스스로는 되게 쉽게 교만해지고 타락하는 존재라는 것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다만, 지금 제가 사는 현대사회에서 나실인이 구약 시대의 삼손처럼 머리를 자르면 힘이 사라지는 방식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성령의 신비로운 사역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제가 이해하는 현대 사회에서의 나실인은 구별된 자로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신 그 정체성에 근거한다고 생각합니다. 흠 없는 행실에 근거해서 스스로 부여하는 자격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빛의 자녀로 옮겨주셨다 정체성에 근거하는 것으로, 자신을 볼 때는 부족하지만 그런데도 포기하지 않고 빛의 자녀로 살려는 방향성이 나실인으로 살아가는데 현대사회에서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매일 회개해야 할 허물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나실인의 사명은 제가 죽을 때까지 지켜야 할 사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잘못했을 때는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더 철저하게 잘못을 시인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단지 시인에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함으로써 다시 하나님이 이끌어주시는 회복을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제는 잘못했어도 오늘은 다시 더 선한 길을 새롭게 고민하고 거기에 열정을 쏟는 삶이 나실인의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적으로나 영적으로나 회복 탄력성의 개념을 적용해 볼 수 있습니다. 내가 한 번 잘못했다고 여기에 완전히 침잠되어 버리거나, 반대로 영화 밀양에 나온 것처럼 하나님의 용서가 어떤 면죄부로 사용되어서도 안 됩니다. 실수하고 넘어지지만,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다시 도전하는 삶이 나실인으로서 제가 제 사명을 쫓는 데 있어서 많은 영향을 주었고, 진로에 관해서 결정할 때도 진로보다 더 근본적인 사명의 차원에서 구별된 모습으로, 구별된 삶으로 계속 살아갈 수 있는 방향을 고민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실인이라는 정체성은 제 사명에 계속 작동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Q: 나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공동체가 영향을 준 부분이 있습니까?
A: 저는 솔직히 신우회 같은 크리스천들만의 모임에 따로 참석하지는 않았습니다. 대학에서도 선교단체나 어떤 크리스천 동호회 활동을 그렇게 활발하게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한 공동체의 유익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지만, 아마 당시에는 제게 어떤 회의감이 있던 것 같습니다. “이상과 달리 현실에서는 결국 나 중심의 신앙생활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질문이 제 안에 있었습니다. 일례로 제가 속했던 한 공동체에서 서로 비전을 이야기할 때, 큰 부를 일궈서 북한이나 가난한 나라를 돕겠다는 친구들이 있었는데 저는 그 친구들에게 ‘네가 많은 돈이 모이게 할 수는 있겠지만, 그 돈이 꼭 너를 거쳐서 갈 필요가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곤 했습니다. 교회에서는 흔히 축복의 통로 혹은 선한 영향력이라는 말로 이런 욕망을 표현하기도 하는데, 저는 꼭 내가 그런 통로가 되어야 하나? 그런 물질이나 도움이 나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필요한 사람들에게 가면 안 되는 건가? 이런 고민을 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저는 일반적인 우리나라 기독교의 분위기보다 훨씬 공적 신앙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대학시절 신앙생활을 했던 교회는 선교와 성령운동을 강조했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대형 교회 중 하나인데, 지금은 사회 참여를 지향하는작은 교회를 다니고 있습니다. 어쩌면 주류 교회에서 알게 모르게 느껴지는 나를 통한 신앙 혹은 나 중심의 신앙에 대해 제가 약간의 아쉬움이나 염증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Q: 그 말씀은 교회나 선교 단체의 활동, 혹은 신우회 활동 같은 공동체의 주된 담론이 공적 신학의 관점으로 보자면 이웃을 향해 있기보다는 나를 향하고 있어 보인다는 말씀이신가요?
A: 다 일괄적으로 그렇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선교회가 지향하는 공동체의 목적이 대중과 구분되는 거룩한 공동체 생활에 있다고 하면, 오히려 이런 것은 말과 행동이 일치하기 때문에 이상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온 세상에 주님을 선포하고 산다고 하면서, 모여서는 정작 자기 이야기밖에 하지 않고, 자신의 진로와 관계, 영적 상태 등 개인적인 생활에대해 주로 고민한다는 것이 과연 선포하는 말과 행동에 일관성이 있는 것인가?’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교회에서도 이런 모습을 많이 보았던 것 같습니다. 제가 다녔 그 대형교회에서도 교회가 이 세상을 변화시키고 사람을 변화시키겠다고 말은 하지만, 정작 공동체 안서는 사회에서 누구나 선망하는 지위나 모습을 개인의 비전으로 삼았던 경우도 적지 않았습니다. 당시에 소위 ‘고지론’의 영향도 강하게 있기는 했습니다. (고지론: 기독교적 가치를 실현하는 사회로의 변화를 위해서 기독교인들이 사회적 영향력을 갖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주장) 그러나, 교회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느냐는 의문을 품고 있는 상태에서 저 자신이 사회에서 선망하는 진로를 따를 것인가? 말 것인가? 이런 고민이 제게는 잘 맞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대학 졸업 이후 소위 '사회생활'을 하면서부터는 이전에는 제가 교회 안에서 어떤 특별한 활동을 한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사회적 기업 혹은 ESG 영역에 크리스천들이 많이 있습니다. 인사나 조직에 대한 대안을 고민하는 영역에도 크리스천분들이 많습니다. 오히려 사회 속에서 이런 분들과는 더 쉽게 친해지고 신앙적인 대화도 잘 되었던 것 같습니다. 깊이 있는 교제를 나누는 분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성장기를 대형교회에서 보내고 난 이후에 사회 현실에 더 깊이 들어가 신앙생활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 안산에 위치한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이 모이는 교회에 나갔습니다. 이곳에서 아이가 좀 자랄 때까지 몇 년 동안 외국인 노동자분들과 함께 부대끼고 활동하고, 상담도 해주는 시간을 보냈는데, 교인으로서 굉장히 의미있는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아이가 생기고 생활 여건도 변화가 있다보니 교회를 멀리 다니기는 어렵게 되었습니다. 결국 동네 근처에서 대안, 생태, 정의 이런 키위드로 교회를 알아보고 수소문한 끝에 고기교회를 찾아서 다니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성향이나 신앙관에 부합하는 공적 신학에 대한 강조점이 있는 교회를 찾았는데 교회의 공적 역할도 물론 중요하지만, 교회에는 그 외에도 중요한 것들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로서의 기본적인 기능들, 즉 예배 공동체와 말씀을 선포하시는 목회자분에 대해서 알아보면서 성도로서 어떤 채워짐을 기대할 수 있는가를 살펴보았고, 아이들과 관련해서도 어린이 학교나 교회 학교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도 고민해 보았습니다. 지금 교회는 제가 살아온 과정과 잘 맞는 것 같아서 좋습니다. 교회 뒤로는 논과 텃밭이 있고 시골의 분위기가 많이 남아있는 교회입니다. 50년대 지은 건물 하나로는 성도들이 지내기가 어려워져서 최근 한 동을 더 마련했는데 최대한 하나님이 주신 자연을 훼손하지 않도록 1층짜리 건물 하나만 지었습니다. 용적률도 건축 허가에 필요한 법적 최소 기준에 따랐습니다. 일반적으로는 넓은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최소가 아니라 최대 기준을 따르지만, 자연을 훼손하지 않으려는 교회의 결정이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생명, 정의, 평화를 모토로 하고 있습니다. 사회 참여 활동도 하고, 정의, 평화 운동을 하는 개인과 기관과도 활발히 교류하고 있습니다. 한편 예배 공동체로서는 교회 안에서 코이노니아에 대해서 많은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제자 훈련 같은 프로그램은 거의 없고, 대신 떼제 찬양, 생명, 정의, 평화를 위한 기도회, 아이들을 위한 생태 교실, 지역주민과 함께 하는 백일장과 추수감사 축제, 소외당하는 이웃과 드리는 연합 예배와 같이 교회의 지향점을 실천하는 행사들이 많이 있습니다. 세월호 4.16 유가족들과 가장 가까운 교회 중 하나가 저희인 것 같습니다. 이분들과 합창대회를 같이 여는 등 이웃을 섬기는 활동을 많이 하고, 환경과 관련하여 원전 반대 활동도 많이 합니다.
교단에 속해있기는 하지만, 교회의 모토인 생명, 정의, 평화에 따르는 경향이 강합니다. 예를 들어 동성애 자체에 대한 교단의 찬반 입장을 따르기보다는 사회 안에서 소외된 대상, 즉 사람으로 존중받지 못하는 사람들과 연대하는 차원에서의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교인들도 대부분은 이런 접근을 지지하시는 분들입니다. 교인 중에는 대안학교 교장 선생님도 계시고, NGO 활동가도 계시는데 기본적으로는 생각이 잘 통하는 분들과 있다 보니 무슨 프로그램을 만들지 않아도 그냥 생활과 관련한 소통이 의미있게 느껴지고 이런 원활한 성도 간의 소통이 저와 우리 가족에게 많은 힘이 됩니다.

(사진출처 : 고기교회 홈페이지)
Q: 말씀 중에 이미 그러나 아직 (already, but not yet)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시는데, 그 개념이 굉장히 깊이 자리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기독교인들은 이미와 아직 사이에 있는 종말을 산다고도 할 수 있을텐데, 개인적으로는 이미와 아직의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고 계시는지요?
A: 이 개념은 대학 때 성경 공부를 하고 신학책을 읽으면서 알게 되었는데, ‘이미’라는 것은 모두 잘 알고 계시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여기에 도래했다는 사실이 선포된 것, 이에 따라 우리가 ‘이미’ 어둠에서 빛으로 옮겨진 것을 이야기하는 반면, 그 하나님의 나라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는 일반적인 수준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개념을 얼마나 심오하게 이해하고 있는가보다 그 개념이 한 사람의 신앙인으로서 제 마음속에 이 사회를 살아가는 데 있어서 건강한 긴장을 만들어준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즉 하나님의 통치가 이미 왔으나 완성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다고 했을 때, 우리에게는 그 완성의 과정에서 예수님의 제자이자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어떤 기여를 해야 하는 정체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미’와 ‘아직’의 개념은 세상이 여전히 불의한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이런 모습 앞에서 좌절하기보다는 현상 너머에서 지금 선포되고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면서 희망과 에너지를 얻을 수 있도록 합니다. 동시에, 완전한 패배주의나 패배감 또는 완전한 승리주의에 빠져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회의적 태도 혹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언젠가 하나님께서 그 나라를 완성하실 것이라고 거리낌 없이 말하는 극단적인 시각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것 같습니다. 김세윤 박사님께서 말씀하신 칭의와 성화가 동시에 같이 갈 수 있도록 잘 연결해 주는 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었기 때문에 나도 이미 완성된 상태로 더 이상의 노력이나 변화가 필요 없는 상태가 아니라, ‘이미’ 그러나 ‘아직’의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그분의 자녀로 부르셨을 때, 나 자신도 그 나라에 걸맞은 부단한 자기 노력과 성령의 열매를 맺기 위한 헌신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갖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영적으로 좌절하지 않고 세상의 악함에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삶, 아까 말씀드린 회복 탄력성의 관점에서 세상을 해석하는 것으로 저에게는 이해되었고 제가 그렇게 사는 데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Q: ESG가 요즘 경영에서 많은 관심을 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전에도 비재무적 요소에 대한 중요성이 언급은 되었는데, 요즘처럼 그 중요성이 부각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지금 ESG가 많은 관심을 끄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A: 저 역시 ESG를 둘러싼 흐름이 지금 사회에서 보이는 큰 변화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이유를 쉽게 두 가지 정도로 따져보면, 하나는 사회가 발전하면서 더 높은 가치를 돌아볼 정도의 여력이 생긴 것 같고, 다른 하나는 그 만큼 사회 발전의 이면에 존재하는 사회 환경적 위기가 더 높아졌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불평등을 비롯한 사회문제나 지구생태계를 둘러싼 환경문제 자체는 오래 지속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80,90년대까지는 생존 자체가 중요한 사회였습니다. 흔히 먹고 살기 위해서 직장 생활한다는 말을 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요즘 사회 분위기는 단지 먹고살기 위해서 직장 생활한다기 보다는 일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고, 기왕이면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어하는 흐름이 커지는 것 같습니다. 경제 성장이 일정 수준 이상이 되면 더 높은 사회적 욕구가 올라오고 더 의미있는 삶을 찾게 되는 그런 방향으로 사회가 발전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반대의 측면에서는 경제의 성장 과정에서 나타나는 부작용이나 문제들이 점점 체감할 정도로 심각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기후변화에 대한 태도가 대표적인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불과 10 여년 전까지만 해도 기후변화에 대한 의구심은 높은 반면 문제의식이 대중적인 수준으로 확산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지금은 전세계적으로 기후변화로 인한 실제 피해 그리고 대중들의 위기감도 매우 높아졌습니다. 노동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영국도 산업혁명 시기에는 아동 노동문제가 심각했고 여성들이 16시간씩 일하는 경우도 빈번했습니다. 오·폐수를 그냥 버려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문제들이 쌓이고 쌓이다여 이제는 인권이나 노동, 환경, 부패와 같은 다양한 영역의 부작용들이 더 큰 문제를 일으키고, 그 심각성 또한 더 쉽게 체감하는 것 같습니다. 기업의 수는 계속해서 늘고 산업계가 우리 사회와 지구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이 지속적으로 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소위 계몽(enlighten)되지 않은 기업들의 행태는 점점 더 사회 환경적으로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가 많고 그러한 부정적 영향이 사회 공동체 전체 혹은 개개인들에게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는 수위로 올라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2015년에는 앞으로의 국가나 국제사회의 발전을 이야기할 때 GDP와 같은 재무적인 경제 지표로만 이야기할 수 없고, 지구생태계와 그 속의 인류 공동체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고려해야 한다는 지속가능발전목표(Sustainable Development Goals, SDGs)가 UN 총회에서 만장일치로 결의가 되었습니다. 큰 틀에서는 이런 전 세계적인 흐름이 중요한 메가 트렌드라고 보고 있습니다.
Q: 방금 계몽(enlightenment)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셨는데, 변화 추진 시 구성원의 의식 수준을 변화시키는 것이 정말 어렵다고 생각하는데 기업의 의식 전환이라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A: 이 업계에서도 자주 이야기되는 부분입니다. 기업은 법적으로는 인격을 갖고 있지만, 영혼이 없는 하나의 시스템이기 때문에 어떤 가치판단을 하지는 않고 항상 자신이 처한 경영환경에 가장 유리한 방향으로 경영을 하게 됩니다. 결국 기업은 고객과 소비자들 원하는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생존하고 성장하 때문에 고객과 소비자들이 기업에 유리한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에 유리한 것을 요구하면 기업들은 따라올 수밖에 없습니다.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부분이긴 하지만, 윤리적이거나 친환경적인 소비자의 역할과 실천이 그래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나아가 우리 사회 전반의 인식 수준도 매우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기업의 갑질 행위에 대해 우리 사회가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다는 인식이 강해지면 강해질 수록 기업은 이런 이해관계자의 요구나 사회적 기준을 지켜 갑질 행위를 줄일 수 밖에 없습니다. 제가 경험한 바로는 모든 기업은 철저하게 주어진 환경에 맞추어 생존하고 성장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기업 자체에 선행을 기대하기보다 기업을 둘러싼 이해관계자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그 중에서도, 제품과 서비스를 구매하는 고객과 기업에 자금을 제공하는 투자자, 그리고 기업 활동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정부기관 등의 정책적 역할이 기업 인식을 끌어낼 수 있는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사진출처: Lifein 지속가능한조직성장의필요충분조건 "임팩트커뮤니케이션" - 라이프인 (lifein.news)
Q: 실은 시민사회나 소비자 그리고 사회적 인식이 바뀌면 그 변화가 기업에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학교나 언론 그리고 수많은 사회 기관에도 영향을 주지 않습니까? 물론 교회에도 영향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ESG의 강조점은 기업 영역보다 오히려 교회에서 더 오랫동안 강조해 온 가치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현재 교회에 대한 사회적 비판이 증가하는 것을 볼 때, 교회가 ESG에 대한 이니셔티브를 놓친 것은 아니냐는 생각도 듭니다. ESG를 오랫동안 고민해 오신 크리스천의 입장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A: 좀 어려운 질문입니다. 제가 교회와 ESG에 대한 고민을 많이 연결해서 생각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말씀드리는 것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다만 현상으로만 보았을 때, 교회가 세상을 비추고 세상을 인도해야 하는데, 즉 교회가 세상에 방향을 제시해야 하는데 지금은 교회가 세상을 따라가기에도 벅찬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있니다. 단편적으로 성경 말씀 자체가 하나님의 진리라는 믿음이 맞는지를 논박해 보자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담고 있는 성경 해석에 대해 고민이 필요하지 않으냐는 화두를 던지는 것입니다. 만약 성경 해석을 문자적으로만 한다면, 구약시대의 율법들 역시 지금도 지켜지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돌로 쳐 죽이는 일이 지금도 일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법체계에 따른 처벌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지금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해석하고 실천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 부분에 대한 교회 내부의 인식이 부족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성경의 말씀을 실천적으로 해석하자고 하면, 실천의 주체인 성도들의 주체적인 성경 해석이 필요합니다. 목회자들의 영역이 대부분 교회 안에 한정된다면 그 분들의 사유의 중심과 관점은 교회를 중심으로 형성될 수밖에 없고 이것이 옳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교회의 전통과 관점에 익숙한 목회자들과 사회의 변화를 겪으면서 살아가는 성도들이 함께 만난다는 것은 지역 교회가 세상과 교회가 만나는 접점이 된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이 주로 일하고 시간을 보내는 영역에서의 고민이 교회 안에서 나누어지고 성경의 가르침과 현실의 문제를 조화롭게 볼 수 있도록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해석되고 실천될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접근과 고민이 있어야 하는데 이런 부분이 그저 교회 안에서 신변에 대한 작은 이야기를 나누고 하나님의 말씀은 짧게 묵상하고 끝나도 되는 정도로 다루어지는 지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결국 실천은 각자가 하든 말든 맡겨지는 것입니다. 감성만 건드리는 단편적인 묵상이나 개인의 큐티 수준 이상의 실천적 메시지가 교회 안에서 나오고 있는가? 그래서 그 메시지가 교인들로 하여금 일상의 현실에서 예수의 제자로, 빛의 자녀답게 구별된 삶을 살아내도록 추동하는가를 자문해 보면 제 답은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 가깝습니다.
사회의 윤리적 기준이 높아지고 있다 보니 사회로부터 교단과 총회가 비난받고 있습니다. 제가 더 두렵게 생각하는 것은 교회가 사회적 기준조차도 따라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회적 기준을 보면 사실을 성경적으로도 지지할 수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오히려 사회보다 더 높은 기준을 교회가 제시해야 하는데 실천적이지 않은 묵상과 감상적인 메시지들 넘어서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또 역사적인 관점에서 일본 제국주의, 한국 전쟁 그리고 군사 독재와 같이 한국 사회의 형성 과정에서 발견되는 구조적인 악이나 불의를 한국 사회가 겪어내는 동안에 한국 개신교는 어떤 목소리를 내었는가를 생각해 봅니다. 일부 개신교 지도자들의 분투를 제외하면 한국 교회에 영향력을 가진 주류 대형 교회들은 과연 그 기간에 어떤 목소리를 내고 무엇을 했는가를 보았을 때, 공적 신앙과 실천적 신앙에서 어떤 기여를 했는지가 불분명합니다. 직면한 사회적 문제에 대해 신학적인 해석을 시도하지 않고 오히려 교인들이 현실을 외면하고 영적인 차원에 집중하도록 함으로써 오히려 영지주의적인 착각에 빠지게 하지는 않았나 반성해 봅니다. 제가 대학 때까지 다니던 대형 교회에서 느꼈던바, 그리고 지금도 주류 교회의 메시지와 그 모습에서 보이는 바로는 이것으로 과연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실천해 낼 수 있겠는가를 자문해 보면 너무 어렵다는 답을 내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제 한국 기독교 안에도 각 학문 영역에 걸쳐 많은 연구기관이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과거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었던 기독교 계열 대기업의 인권 착취 사례에 대해서 관련 기관들로부터 성경적 관점에 기반한 분명한 해석과 대안 제시가 이루어지지 못하는 현실을 보고 안타까웠던 적이 있습니다. 이게 우리의 현주소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미 여러 해가 지난 일이지만 여전히 바뀐 것은 별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최근에 교회들이 사회봉사도 더 열심히 하고 사회적 기업을 지원하거나 참여하는 교회들이 늘고 있습니다. 그런데 흐름이 생긴 것도 교회가 주도적으로 그런 필요를 이야기하고 능동적으로 한 것이라기보다는 사회에서 그런 역할을 하던 사람들이 교회로 가서 교회가 이런 것을 해야 하지 않습니까? 라는 문제를 제기하고 사회의 변화를 설득해서 이루어진 경우가 훨씬 더 많다는 점입니다. 물론 위에 말씀드린 제 고민과 문제의식이 한국교회 전체가 그렇다고 단정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평가할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동시에 한국 교회 안에서 성경의 메시지를 급진적(Radically) 실천하려는 교회의 사례들도 자주 접하고 있습니다. 이런 교회를 통해 영감을 얻기도 합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주류라고 할 수 있는 지배적인 흐름을 보자면, 교회의 메시지가 이 사회의 현실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교회가 세상의 걱정을 살 정도로 사회적 기준과 동떨어져 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있습니다. 한국 교회가 ESG의 이니셔티브를 놓치게 된 원인 분석은 어렵지만, 현상적으로 보이는 부분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Q: 지금 근무하시는 기업에 소위 MZ세대로 불리는 젊은 세대들의 관심이 높다고 들었습니다. 다음 세대인 청년들에게 어떤 점이 매력적으로 보였다고 생각하십니까?
A: MZ 세대에 대한 연구는 이미 많이 진행되어서 제가 그것을 다시 정의할 필요는 없다고 보입니다. 회사에서 근무하면서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는 MZ 세대에 대한 관점에 대해 동의하는 부분도 있고, 조금 다르게 생각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확실하게 보이는 것은 MZ 세대가 눈에 보이는 것 이외의 고민 들을 한다는 점입니다. 그 이유가 먹고 사는 문제 혹은 보이는 것에 집중했던 이전 세대보다 지금 세대가 더 나은 환경에 있기 때문인지, 그래서 더 자신감이 있기 때문인지 혹은 사회복지나 안전의 수준이 이전보다 더 높아지면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복합적인 원인이라고 생각이 됩니다만, 어찌 되었든 MZ 세대는 자기주장이 더 분명하고 더 분명한 자의식을 갖고 있어 보입니다. 또한 자신들이 선택한 부분에 대해서는 굉장히 책임감이 강하고 이전 세대보다 외부에서 주어지는 위계와 같은 권위에 영향을 받기보다는 합리적으로 사고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이전 세대와 같이 회사에 마음을 쏟는 일을 MZ 세대에게는 기대하기 어렵다는 주장은 지나치게 단편적이고 성급한 결론 같습니다. 제가 조금 다르게 바라보는 점은 MZ세대도 사람이 보편적으로 고민하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 쉽게 공감한다는 점입니다. 우리 회사의 미션과 핵심가치를 분명히 제시하고 이런 것을 같이 고민할 사람이 오기를 바란다고 분명히 이야기해 줄 때, 아주 진지한 관심을 보입니다. 일반적으로 조직에 대한 충성도가 낮다는 인식은 오해라는 생각이 듭니다. 먹고 사는 일 이상의 가치가 보였을 때 MZ 세대는 자기의 인생을 걸고 도전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더 나가서, 교회에서 청년들이 위기라고 합니다. 저는 교회의 이 위기도 본질적으로는 동일하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의 근본으로 더 들어가지 못하고, ‘이 세대는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니까 그래서 신앙에는 관심이 없어…, 예전에는 성경 공부를 세 시간씩 했는데 지금은 한 시간도 못 하고…’ 이런 생각들이 우리가 그냥 지레짐작으로 만들어 낸 것은 아닐까 반성해 봅니다. 더 근본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문제인데, 근본적인 원인에 대한 고민 없이 현상에 맞추려고 더 간헐적으로 더 분절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 우리 교회 청년들만 봐도 그 핵심에 있는 고민은 저희 세대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 친구들이 아직 경험이 없기 때문에 사고가 더 깊지 않을 수도 있고, 견디는 힘이 더 약해 보일 수는 있지만 자기 고민의 심각한 정도는 전혀 다르지 않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인생의 근본적인 차원에서 세대 간의 코드를 연결하는 것은 이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전 세대와 비교하면 청년세대가 암울한 전망을 갖게 하는 현실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일례를 들어서 이제 우리나라에서 아무리 좋은 대기업에 다녀도 급여를 모아서 집 한 칸을 마련하는 일이 불가능에 가깝고 출산율이나 이런 것을 봐도 아이 낳는 일 자체도 의지를 갖고 해야만 가능한 일이 된 것 같습니다. 점점 일자리들이 줄어들고 있는 암울한 환경은 실제로 존재합니다. 이 암울한 현실은 지금의 장년 세대들의 지속 가능하지 않은 사고의 결과물입니다. UN에서 제시하는 지속가능성의 개념은 미래 세대가 자신들의 필요를 충족시킬 가능성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현재 세대가 자신의 필요를 충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80년대 이전 세대들은 미래 세대의 가능성을 훼손시키면서 자신들의 필요를 충족시켰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여기에 대한 부채감이 아주 큽니다. 그런 부채감을 가진 기독교인들이 청년들에게 창업을 통해서 먹고살 수 있는 환경을 갖추어 주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대기업이 제공하는 한정적인 기회만으로는 모든 청년이 누릴 기회와 환경을 마련해 주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속 가능성 개념은 아주 중요합니다. 이런 개념이 없다면 우리는 계속 미래 세대의 가능성을 앞당겨서 쓰고 이 친구들은 기후 변화 대응에 대해 더 큰 비용을 우리를 대신해서 지불해야 하는 것입니다. 직면한 문제의 해결에서도 세대 간에 불평등하게 책임을 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른 것입니다. 그래서 내 자식, 우리 교회 청년 이런 개념을 떠나서 한 세대, 한 집단으로 이해하고 윗세대에서 지속 가능성 관점에서 노력해주어야 합니다. 이러한 고민과 노력은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Q: 한국 교회를 보시면서 안타깝게 느끼시는 점과 그런데도 희망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A: 안타까운 점은 많이 말씀드렸고, 저의 개인적인 고백이기도 합니다만, 가장 큰 힘은 절망의 상황에서도 희망을 주시는 하나님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부모님이 부자라면 많은 것을 도와 줄 수 있겠지만 그 돈이 사라지면 도움도 끝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정적 어려움이든, 사회적 어려움이든, 우울감 같은 감정적 어려움이든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보게 해주시는 분이 계신다는 것이 희망입니다. 그분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고 우리를 빛의 자녀로 또 하나님의 자녀로 확정하셨다는 점, 또한 그 하나님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기를 원하시는지를 성령님을 통해서,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계신다는 것, 그리고 그동안의 교회와 기독교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들이 우리가 절대 절망할 수 없도록 희망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현상으로서의 교회의 행태와 모습은 실망스럽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는 또한 역사에서 그리고 말씀에서 선명히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이것을 우리가 실천해 나가는 방식에 있어서 이제 사영리를 들고 복음을 전하는 수준에서 머물지 말고, 이 세상의 구조를 만들고 이 세상에서 목소리를 내고 또 한 명 한 명을 도와주면서 하나님의 도를 전하고 이런 활동을 통해 하나님이 주신 복음의 메시지와 생명의 에너지를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이런 전달자의 역할을 우리가 명확하게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고 그런데도 다시 오실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의 완성을 지금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함께 이루어 갈 수 있다는 점이 바로 희망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청년들과 이야기할 때, 우리의 삶을 관통하고 우리의 하루를 우리의 삶의 현장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진짜로 사모하고 찾아야 한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저의 경험에서 비롯된 권면입니다. 비록 말씀이 꿀송이처럼 달다는 느낌을 가져보지는 못했지만, 복음서에 나온 하나님의 나라가 밭에 숨기어진 보화와 같다는 것을 성경 속에서 발견하고, 이것에 대해 기도하고 묵상하고 예배드리면서 성령님을 통해서 말씀의 오묘함과 하나님 나라의 실재를 선포할 수 있음을 알았을 때 저는 정말 보물을 찾은 것 같은 기쁨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모든 소유를 팔아서 사고 싶은 것, 바로 희년을 선포하는 제 사명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냥 우리끼리 복음을 나누고 예배하고 기뻐하는 데서 그치지 말자, 공적인 영역까지 신앙을 연결하고 같이 가다 보면 희망이 있지 않을까 하는 신념으로 여기까지 온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려고 하다 보니까 그런 활동들을 더 보게 되는 것 같고, 그게 소수인지 다수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그런 활동과 그런 사람들에게서 희망을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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