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성도들의 참여와 실천이 건강한 교회를 만듭니다:사회학의 렌즈로 교회 공동체를 고민하는 기독학자 김규희
- 보현 전
- Nov 3, 2022
- 11 min read
Updated: Nov 4, 2022

Q: 본인과 하시는 일을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A: 저는 지금 시민단체에서 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과 별개로 저의 정체성을 가장 잘 설명하는 단어는 기독학자입니다. 좀 낯설게 들리는 단어일 수도 있는데, 저는 사회과학을 연구하는 학자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또는 기독교적 시각으로 사회를 연구하는 학자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달리 설명하면, 사회학이라는 분야에서 교회적인 고민과 기독교적인 정체성을 바탕으로 작업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사회학 역시 매우 넓은 연구 범위를 가진 학문입니다. 저는 주거 및 커뮤니티 이론에 많은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시리아 난민들을 대상으로 박사학위 논문을 작성하고 있고, 사회적 혼합 문제에 관해서 연구를 해왔습니다.
Q: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갖고 연구를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입니까?
A: 기독교적인 문제 인식과 관점에서 사회를 바라본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적 세계관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겠지만, 하나님 나라와 천국, 하나님 나라와 그 속성 그리고 교회와 교회의 구성원인 성도들이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사회를 보려고 합니다. 연구 질문도 이런 개념에 기초해서 설정합니다. 사회 과학의 방법론을 따라 연구를 수행하고 사회 과학적인 개념을 사용하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어떻게 세상 안에 구체화되는지 혹은 사회학적 관점에서 공동체를 구성하는 원칙들이 교회에는 어떻게 적용되는지에 대한 연구를 수행한다고도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주거라는 것을 기독교적으로 묵상하면 이상적인 주거의 개념은 천국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비록 천국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지만, 천국이 가진 특성들 즉, 영구적인 안정성, 감정과 관계 그리고 신체적인 안녕을 보장할 수 있는 곳, 그리고 쉼과 회복이 있고 자신의 근본적인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곳과 같은 개념들과 연결해서 생각 해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주거 환경을 만들기 위한 사회적 노력을 통해서 이상적인 주거 혹은 지역의 환경이 더욱 이상적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면 완벽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사회 가운데 나타났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방식을 통해서 사회학을 연구한다면, 그 연구의 결론은 매우 신학적이고 기독교적인 가치를 담을 수 있습니다.
Q: 기독학자의 뜻을 잘 이해했습니다. 어찌보면 사회학의 방식을 통한 신학적 실천이라고도 할 수 있을 듯 합니다. 이런 방식을 시도하시게 된 배경이 궁금합니다. 그리고 지금 현재는 어떤 일을 하고 계십니까?
A: 저는 보수적인 교회에서 모범적인 학생으로 자랐는데, 원래는 신학을 공부하고 싶었습니다. 지금은 동의하지 않지만, 당시에는 썩어 없어질 세상의 일과 비교해서 하나님의 일이라 부르던 목회를 좀 더 거룩하게 여기는 시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른들께서 신학교를 가기에는 제 성적이 좀 아깝다는 생각을 하셨는지, 신학을 하겠다는 제 의견을 받아주지 않으셨습니다. 일단 좋은 학교에 가서 학부를 마치고 그때도 결심이 변하지 않으면 신학대학원을 가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너무 고민이 되어서 한 신학교 교수님께 면담을 신청해서 여쭈었는데도, 같은 조언을 해주셨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한국 교회를 위해서 사용하고 싶었는데, 세상 것은 썩어질 것이라면서 왜 어른들은 신학을 공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실까?’라는 의문을 품고 대학교에 진학했습니다.
그곳에서 기독교 세계관 연구회라는 동아리에서 활동하면서, 그동안 교회에서 들은 말씀을 보다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틀을 만들 수 있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되었고, 저의 전공 공부와 신앙과의 관계, 공부하는 것과 기도하는 것의 차이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모태신앙으로 교회에서 자란 제가 회심의 경험이라고도 할 수 있을 만큼 저의 신앙적인 관점이 세워졌던 시기입니다. 그리고 제가 대학생이던 시절, 서남아시아에 큰 쓰나미가 발생해서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 현상을 보면서 만약 그 지역에 안전한 인프라나 건축물이 있었다면 피해를 줄 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생각이 계기가 되어서 학부에서 도시 계획을 전공하게 되었습니다.
도시 계획의 목표는 좋은 도시를 만드는 것입니다. 제게는 이 목표가 하나님 나라를 만드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게 다가왔습니다. 좋은 도시는 무엇일까를 고민하다 보니 안전하고 아름다운 건축물이나 수도나 교통과 같은 인프라, 양질의 주거와 같은 가시적인 부분 외에도 양극화가 두드러지지 않거나 범죄가 없는 질적인 측면도 고려해야 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좋은 도시라는 것에 대한 구체적인 개념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 필요했고, 사회 과학자의 눈으로 개념을 이해하고 해석하고 포착해내는 과정이 있었지만, 신앙인으로서의 저의 정체성이 그 내용을 결정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지금 마무리 중인 저의 박사학위 논문은 시리아 난민의 주거와 공동체 경험이 주제입니다. 연구 과정에서 물리적 개념의 집(House)이 아닌 안식처로서의 집(Home)을 개념화하면서 단지 주택이 아닌 확대된 개념으로서 주거의 중요성을 다루고 있습니다. 주거의 개념에서 볼 때 한 개인이나 가정을 둘러싼 사회적 소속감이나 공간적 소속감 그리고 공동체적 소속감이 필요한 것을 알았고 이러한 인식은 성경에서 배웠던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에 대한 신앙과 일치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제 연구는 사회과학의 눈으로 읽으면 사회과학의 이론을 연구한 논문이지만, 교회의 관점으로 읽는다면 교회에 대해서도 충분히 적용할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기독교적 학문의 방식입니다.
지금은 시민단체에서 정부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는데, 충남지역에서 시민사회를 활성화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지역 주민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 볼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어 보고자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법적 책임을 준수하는 시민성은 상당히 활성화된 반면, 서로의 삶과 삶을 연결하고 연대하는 역량은 오히려 퇴행하고 있다는 비판이 많습니다. 이런 비판에 대한 대안으로 사회 주류 시민이 주변화된 이웃에 대해 인식을 높이고 주류 시민과 주변화된 이웃 간의 관계를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공론장을 형성하는 것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공론장에서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 이웃의 문제를 먼저 생각해 보게 함으로써 연대적 관점 형성을 촉진하고 있습니다.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구체적인 사례나 가시적인 변화를 이끌어내는 수준까지는 미치지 못했지만, 학교 밖 청소년, 장애인, 니트 청년(NEET: 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의 두음자어로 무직이면서 교육이나 훈련을 받지 않으면서 취 의지도 없는 사람을 의미함), 외국인 등 시민 사회에 동료 시민으로서 존재 하지만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 의미가 있습니다. 일례로 이미 충남도 내에도 외국인이 전체 인구의 20%를 차지하는 지역도 있지만, 이들이 사회적 담론 형성에 참여하거나 고려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학교 밖 청소년, 장애인도 마찬가지입니다.

Q: 앞에서 삶의 방향을 찾아오신 내용을 말씀해 주시면서 교회와 세속을 구분하는 이원론적 관점을 말씀해 주셨는데, 결국은 그때를 기준으로 말하자면 썩어 없어질 것을 연구하시는 것은 아닌가요? 지금 하시는 일을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A: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신다는 말씀과 하나님께서 지금도 일하고 있으시다는 말씀이 제가 답을 찾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공생애를 사시기 이전에 생활인으로서 사셨습니다. 목수로 일하셨을 때, 예수님께서 만드신 침대는 특별히 더 거룩했을까요? 만약 그렇지 않고 그 침대도 썩어 없어진다면 예수님은 썩어 없어질 것에 삶을 낭비하신 것일까요? 제가 그 말씀을 묵상할 때에 예수님께서 일을 통해서 세상을 풍요롭게, 또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신 것임을 알게 되었고 세상에서의 일은 유한할 수 있지만, 그 섬김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데 의미 있게 쓰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동시에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이기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삶은 성도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삶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직업적 섬김이 이웃을 이롭게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데 기여하는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세상의 일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낼 수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지금 제가 하는 연구도 저에게는 너무 즐겁고 재미있고 유익한 일입니다. 미국의 작가이자 신학자인 프레더릭 뷰크너는 세상의 깊은 배고픔과 자기의 깊은 즐거움이 만나는 곳이 하나님이 당신을 부르신 곳이라고 했는데, 제게는 사회학의 렌즈를 가진 기독학자라는 자리가 바로 그 자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Q: 한국 사회의 공동체성에 대해서 언급해 주셨는데 공동체를 고민하는 사회학자의 눈에는 한국 사회의 어떤 특징이 보이는지 궁금합니다.
A: 한국 사회라는 범위가 너무 넓어서 학자로서라기보다는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소견을 말씀드릴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산업화되기 이전의 전통 사회는 출생지나 거주 지역 같은 지리적 요소가 공동체 형성에 중요한 연결고리였고, 이후 직장이나 학교처럼 사회적 관계가 공동체 형성과 인식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시대는 사회적 관계보다 개인이 지향하는 가치를 기반으로 하는 탈 정서적이고 탈 공간적인 공동체 즉 가치 중심의 공동체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단편적으로 인터넷의 발달로 익명성의 그늘에서 가치 중심적인 커뮤니티가 활성화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외에도 다양한 특징들이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공동체의 상은 시대 변화에 따라 함께 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특히 젊은 세대일수록 자기 정체성 인식에 더 다양한 축들을 가진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공동체 자체도 더 세분되고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 같습니다.
Q: 사회 공동체의 구축이라는 주제가 성도로서 혹은 교회에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A: 제가 경험하고 배운 것들이 어떤 현상의 의미를 해석하는 활동을 통해서 세상에 이바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섬길 수 있는 부분인데, 예를 들면 지금 제가 노력하고 있는 공론장의 활성화입니다. 그런데 공론장을 만들다 보면 나올 만한 분들이 나오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무슨 말이냐면, 할 말이 있는 그래도 좀 잘나신 분들, 공론장에 나올 시간적 여유나 생활적 여유가 있으신 분들 혹은 공론장을 통해 어떤 이익을 달성하려는 분들이 주로 나오십니다. 제가 공론장을 만들 때, 협력하시는 다른 분들께 늘 부탁하는 것이 공론장의 경험이 없는 분들을 초대해 달라는 것입니다. 공론장에서 소외된 이웃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고치신 예수님, 혹은 소외된 시민들과 어울리셨던 예수님처럼 먼저 다가가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다가가심으로써 누군가의 신체적 혹은 사회적 장벽 제거하시는 것처럼, 예수님을 흉내 내어 보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이웃 시민에 대해 이야기하도록 함으로써 먼저 서로에게 관심을 두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사회적 규칙인 법만 잘 지키면 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개념도 포함되어 있다는 인식을 확산시키고 싶습니다.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일상적인 경험을 새롭게 해석하고 경험해 보는 것이 그 일의 출발점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충청남도의 인구가 약 220만 명 됩니다. 그 중에서 저희가 만날 수 있는 분은 많이 잡아도 천명을 넘기가 어렵습니다. 영향력으로 따지자면 효과를 거의 기대하기 어려운 수준입니다. 그런데 저는 영향이 단기간에 나타날 수는 없지만, 구성원 중의 일부가 이런 공감과 연대의 경험을 쌓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회나 집단의 변화는 변화의 크기가 크면 클수록 더 많은 에너지를 요구합니다. 만약, 단기간에 큰 에너지를 투입하기 어렵다면, 오랜 시간을 통해 필요한 에너지를 축적해야만 변화가 가능합니다. 마치 복음화에 수 십 년 혹은 수 백 년이 걸리기도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제가 하는 일의 결과를 제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습니다. 제가 무언가 새로운 일을 시작한 사람이라는 생각도 안 하고, 그 변화의 끝 볼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한국에 복음이 전파된 과정을 보면 어떤 분은 성경책 한 권을 전하고 삶을 다한 분도 계시고, 누군가는 이 땅에서 생을 마감했지만, 반면, 누군가는 왔다가 돌아갔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각자는 하나님께서 주신 역할을 감당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도 하나님이 세상에서 일하시는 한 영역에서 그때 그때 맡겨 주시는 역할을 잘 감당하고 싶을 뿐입니다. 제가 시민사회 전체 혹은 시민 한 분, 한 분의 삶을 바꿀 능력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단지 각자의 삶에 작은 자극을 주고 좀 더 좋은 사회를 만들어 가는데 작은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매우 기쁠 것으로 생각합니다.

충남지역문제해결플랫폼 주관 주민공론장 '타운홀미팅'
Q: 요즘 교회도 사회도 다 공동체에 대해 관심을 두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A: 공동체라는 말은 워낙 다양한 맥락에서 사용되고 있어서 그 자체가 굉장히 해석학적인 단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공동체라는 단어의 뜻도 사람마다 이해하는 뉘앙스가 다르고 연상되는 감정들도 다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일반적으로 집은 따뜻한 안식처의 느낌을 주지만 누군가에게는 억압과 폭력을 떠올리게 할 수도 있습니다. 공동체라는 단어가 마을, 지역, 국가, 또래, 가정 더 나가서는 혈연, 지연 등등 워낙 다양한 개념과 결합해서 사용되기 때문에 그 뜻을 구체적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만약에 공동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자기가 지향하는 공동체를 설명해 보면 더욱 구체적인 내용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공동체를 지향한다는 말이 누군가에게는 일주일에 한 번씩 대여섯 명이 커피를 나누면서 담소를 나누는 모임으로, 누군가에게는 성경 공부를 같이하는 모임으로 또 누군가에게는 함께 뜨겁게 예배를 드리는 모임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교회가 갖고 있던 공동체에 대한 상이 만약 산업화 이전처럼 지역 중심으로 생활과 생산이 함께 이루어지는 전통 사회에 기반을 둔, 서로 숟가락 개수까지 알고 삶의 많은 부분을 모여서 함께 나누는 모습이라면, 성도들이 실제로 인식하거나 기대하고 있는 공동체의 모습은 이와는 사뭇 다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현대 사회는 개인의 정체성이 다중적인 축을 바탕으로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의 이미지 또는 한 축 만을 강조해서 정체성을 이해하는 것은 실패하기 쉽다고 보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다양성과 포용성 그리고 투과성을 강화해서 교회의 안과 밖을 연결해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양성이란 서로 다른 사람, 다른 생각, 다른 집단, 다른 방식을 적극적으로 이해해 보는 태도를 말합니다. 포용성은 다른 것들을 인정하고 품어보려는 태도이고, 마지막으로 투과성은 경계를 느슨하게 해서 서로 다른 사람들이 쉽게 경계를 오고 가는 것을 말합니다. 다원화된 현대 사회에서 폐쇄적이고 굳어진 정체성은 점점 힘을 잃어갈 것으로 생각합니다. 교회가 서로 달라 보이는 사람이나 집단과 적극적으로 대화를 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미 개신 교회 내부에서 교회 간에 신학적으로나 실천적인 면에서 일치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많이 보고 있지 않나요? 교회와 성도들이 상호간에 공통적인 정체성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동시에, 다름에 대한 인식도 함께 확대해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교회 안에서 각자의 성향에 따라 무리가 만들어지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행동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만 그 집단이 타인에 대해서 배타성을 가질 때 문제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투과성이 좋은 공동체는 이 소그룹에서 저 소그룹으로 이동하거나, 혹은 다중적으로 소그룹에 속하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은 공동체입니다. 한 교회 안에서의 교류만이 아니라 교류의 범위가 넓어져야 합니다. 한국 교회의 투과성이 높아진다면 교회 밖에서도 다양한 소통과 경험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Q: 왜 교회의 투과성을 높이기가 어려울까요?
A: 저는 신학자가 아닙니다. 학문으로 서의 신학은 일반인의 수준이라서, 사회 과학에서의 경험을 갖고 말해보자면, 너무 이분법적인 집착은 실수를 낳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사회 과학의 방법론 중에 질적 연구와 양적 연구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질적 연구는 비 계량적인 자료를 통해서 왜, 어떻게를 묻는 심층적인 질문을 탐구할 때 적합하고, 양적 연구는 계량적 자료를 통해서 전체적인 현상이나 추세를 파악하는데 강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회학 연구에서 특정 연구 방법이 더 우수하다는 주장을 하시는 분들이 가끔 계십니다. 특히 계량적 자료만이 과학적이라고 믿는 분들은 질적 연구를 저널리즘으로 깎아내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질적 연구는 계량적 자료가 표현하지 못하는 내밀한 문제를 밝혀낼 수 있고, 통계 역시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어도 상당한 부분은 설명할 수 있습니다. 즉 문제에 따라 접근의 방식이 달라져야 하고 결국 각각 다른 접근에서 얻은 지식을 통합해야 비교적 진실에 가까워 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로 다시 돌아가 보자면, 교회의 투과성이 낮은 이유 중 하나는 '신학적 경직성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일을 직업적으로 감당하시는 신학자분들이나 목회자들께 당부 드리고 싶은 것은 그분들의 관점과 태도가 성도들에게 얼마큼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인식하시면 좋겠습니다. 다들 교회의 통일성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시면서 정작 다른 의견들과 어떠한 학문적, 실천적 합의도 이끌어 내지 못하고 있다면, 성도들 입장에서는 그 말을 신뢰하기가 참으로 어렵지 않을까요? 같은 성경 본문에 대해서도 목사님마다 다른 해석을 하시는데, 자신의 해석을 절대적인 진리처럼 표현하는 것은 좀 신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성경의 다양한 번역본 마다 서로 다른 표현들도 있는데, 해석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런 현상들에 대해서도 이해할 만한 설명이 뒤따라야 할 것입니다. 이상적으로는 성도들이 다양한 해석을 주체적으로 시할 수 있도록 교회가 도와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신학이 학문적인 합리성을 갖춘 학문이고 그 안에서 다양한 의견들이 존재한다면 말입니다. 교회 전체적으로 통일성이 보이지 않는데, 또한 다양성도 인정하지 않으니까 자신이 속한 그룹 안에서는 다른 그룹을 터부시하고 그룹 간의 대화는 아예 시도도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투과성이 높아질 수 없는 것은 아닐까요?

Q: 한국 교회를 보실 때 가장 안타까운 점은 무엇입니까? 그럼에도 희망을 찾는다면 어디서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요?
A: 한국에 셀 수 없이 많은 교회가 있는데 제가 경험한 것은 그 중 너무 일부라서, 그냥 개인적인 인상 정도의 답을 드릴 수 있을 듯합니다. 교회가 자신의 이미지를 스스로 정화할 수 없다는 것이 가장 안타깝습니다. 얼마 전에 하나님도 자신 앞에서 까불면 죽는다 등의 발언을 한 목사가 있습니다. 교회에 대한 이해가 없는 분들이 보실 때는 이렇게 목소리가 큰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이미지가 한국 교회 전체의 이미지로 오인될 수 있습니다. 그분이 누군가에게는 선지자로 여겨질지는 모르겠지만, 평범한 성도 입장에서도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발언에 대해서 한국 주요 교단은 아직도 정확한 입장을 표현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분에게서 문제라고 생각하는 부분은 정치에 관해 어떤 학문적 훈련이나 납득할 만한 경험도 쌓지 않은 사람이 설교와 같은 공적 공간에서 사적 정치적 판단을 하나님의 말씀인 냥 쏟아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욱 안타까운 것은 비단 이외에도, 적지 않은 분들이 논리적으로 촘촘하지 않은 사적 판단을 설교 강단에서 쏟아내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있습니다. 저는 이런 문제의 배후에 하나님의 신적 권위와 목회적 권위에 대한 심각한 혼동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목회자에게는 하나님의 전지전능이 없습니다. 오직 말씀에 대한 해석적 권위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보통은 3년의 석사 과정 훈련 뒤에 얻어지는 권위입니다. 사회에서도 어떤 분야의 전문가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이보다는 더 많은 훈련과 학습이 필요합니다. 또 기도나 묵상 혹은 말씀을 실천하는 데 있어서 모범이 됨으로써 성도들의 존경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존경이 목사의 정치관이나 문화관 혹은 사회에 대한 관점도 존중한다는 의미는 아닐 수 있습니다. 난민을 만나보지도 않은 분들이 너무도 쉽게 난민을 몇 개의 단어로 재단해 버리고 그것이 성경적 진리인 것처럼 선포해 버립니다. 목회자가 사회나 정치, 혹은 경제에 대해서 건강한 성경적 해석을 하려면 나와는 다른 관점이나 전문가의 의견에 대해 폭넓게 듣고 이해한 후에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런 학습도 없는 사적인 촌평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하는 것이 과연 목회적 권위일까요? 저는 목회자로서 권위를 갖고 발언해야 하는 영역과 사적 판단의 영역 간 혼동이 지금 교회를 혼란스럽게 하고, 교회가 정치와 이념에 따라 분쟁하도록 만든 중요한 원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목회를 준비하시는 분들께서 신학교에서부터 이런 점들을 배우고 훈련하면 좋겠습니다.
희망은 건강한 목회자와 성도들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한국 교회에 드러나지는 않아도 훌륭한 목회자들이 많이 계시다고 생각합니다. 제 주변에서도 정치적 입장이 아닌 성경적 관점에서 정치 사회 현상을 읽어 내시는 분들도 많이 보고 있습니다. 이런 분들이 사회 전면에 드러나지 않는다고 한국 교회가 망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런 교회와 목회자를 성도들이 잘 발굴해 내면 좋겠습니다. 성도들이 분별할 눈이 없다면 한국 교회에 아무리 진리를 선포하는 목회자들이 많다고 해도 그 교회들이 한국 교회의 전체적인 흐름을 만들어 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현실이 희망이 없어 보이더라도, 찾아보면 희망의 근거가 되는 교회들이 있다 생각합니다. 제한된 경험을 바탕으로 그저 불만을 토로하며 신앙을 부인하고 뒤로 물러나기 보다는, 적극적으로 진리를 찾고 이 진리를 찾는 사람들과 교회를 이루어서 세상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는 삶을 살아내면 희망이 있지 않을까요? 비유를 들어보자면, 저는 멜론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멜론을 먹었는데 상한 멜론이라면 어떻 해야 할까요? 이상한 맛이 날 것입니다. 그렇다고 세상의 모든 멜론이 다 상한 것이 아닙니다. 다시는 멜론을 먹지 않는 것보다는, 상하지 않은 멜론을 찾아서 맛있게 즐기는 것이 낫습니다. 눈 앞에 보이는 현상 때문에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좋은 교회를 찾고 힘을 모아서 함께 교회를 세워 나가면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에 가까워지는 길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제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는 시간 중의 하나가 몽골 국제 대학교에서 강의했을 때입니다. 그곳에 100여분의 선교사님들이 계셨는데, 워낙 다양한 배경에서 모이다 보니까 어떤 주장이라도 단지 하나의 의견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즉 개인에게는 절대적인 권위가 있는 주장이더라도, 공적인 대화의 장에서는 하나의 의견으로 간주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경험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감리교, 침례교, 장로교 등 정말 다양한 신학적 배경을 가진 분들이 모여서 칼뱅이든 웨슬리든 각 전통의 권위자가 설명한 교리도 하나의 의견으로 두고, 서로 함께 논의해 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혼란스러움을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풍성함을 경험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의견이 결국은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찬송과 우리의 순종으로 결론이 지어지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정말 다양하게 하나님을 묵상할 수 있구나, 우리의 순종도 이렇게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구나. 하나님은 내 머리로 다 담을 수 없을 만큼 광대하신 분이구나’를 진심으로 체험한 시간이었습니다. 그 경험을 통해서 저의 개인적인 신앙이 보다 다듬어 질 수 있었습니다. 만약 어떤 목사님께 1년에 적어도 다섯 번은 다른 교회에서 예배 드려 보시라고 말씀드리면 너무 파격적인 상상이 될까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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