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교회의 모습을 다 알지 못한다는 겸손함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교회의 스펙트럼을 넓히기 위해 도전하는 김태양 목사
- 보현 전
- Aug 5, 2022
- 9 min read
Updated: Sep 23, 2022

Q: 본인과 사역에 대해서 소개해 주시겠습니까?
A: 메마른 땅에 헤딩하는 목사 김태양 입니다. 저는 어릴 때부터 꿈이 명확했습니다. 철이 들기도 전에 누가 저에게 물어보면 목사가 되겠다고 답을 했습니다. 아버지께서 목회자이셨기 때문에 그 영향도 있을 수 있지만, 아버지께서 교회를 개척하셨던 과정을 보면서 목회가 결코 쉽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왜 목회자가 되고 싶었는지에 대한 명확한 이유는 지금도 계속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아버지의 목회를 보고 자라면서 목회가 대단히 재미있는 영역이라는 것을 알게 해주었던 기억들도 있습니다. 그런 기억들이 지금도 목회의 길을 가게 하는 것 같습니다.
Q: 메마른 땅에 헤딩이라는 표현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A: 저는 교회를 개척하는 현장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1997년부터 1999년까지 러시아 선교사로 다녀왔습니다. 당시에 러시아에서 교회를 개척하는 팀에 배치가 되었습니다. 3년 동안 14살 가량의 아이들을 매주 초대해서 함께 놀았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노는 것이 제가 교회를 개척하는 방법이었습니다. 한국으로 돌아와서 2001년부터 이찬수 목사님을 도와 분당 우리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2010년까지 교회 개척에 대해서 많은 것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에 SNS가 소개되던 시기였는데 교구를 섬기면서 성도들과 SNS로 소통을 시작했습니다. SNS를 통해서 실시간 소통이 이루어지니까 성도들과 사역을 함께 하는 것 같은 현장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말씀이나 기도를 나누는 것은 물론이고, 편찮으신 교구 식구를 뵈러 가면, 성도들이 다이렉트 메시지로 서로 위로하고, 아멘으로 함께 기도하는 일들이 가능해졌습니다. 그러던 중, 분당 우리 교회에서 제 교구에 계시던 성도님의 동생분이 인도네시아에서 경추를 다치는 사고를 당하셨습니다. 동생분께 복음을 전하지 못했는데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으니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기도를 요청하셨습니다. 함께 기도하는 중에 동생분께서 한국으로 이송되셨습니다. 그분을 만나 뵈면서 그분 가정에 작은 힘이라도 되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노래를 하나 만들어 드렸습니다. 아직 신앙이 없으셔서 기도를 어떻게 할지 모르시기 때문에 그 가정을 위한 기도를 노래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 후에 이 노래가 그 가정에서 매일 드리는 기도가 되었습니다. 작은 빛이 그 가정에 비추이고 난 이후에 놀라운 일들이 생겼는데, 그 동생분께서 자기 병실에 있는 젊은 아빠를 돕고 싶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젊은 아빠도 경추를 다쳤는데 그 가정의 환경이 너무 어려우니 돕고 싶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경추 2번을 다치신 분 중에 살아남는 분들이 많지 않습니다. 그 이야기는 경추 2번을 다치는 사고가 정말 큰 사고라는 뜻이고 이는 그만큼 주변의 도움이 절실하다는 뜻입니다.아마도 그 젊은 아빠 환자가 어려운 환경에 있는 것을 아시고는 돕고 싶은 마음이 드셨던 것 같습니다. 분당 우리 교회를 사임하고, 그 직후에 경추 2번을 다친 젊은 아빠를 함께 도울 분들이 함께 모여보자는 메시지를 SNS 남겼습니다. 몇 일이 지나지 않은 2010 한 해가 저무는12월 31일에 저희 집에 30여 분이 모여서 작은 모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서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영상과 관련된 일을 하시는 분들이 도움을 주셔서 지금까지 만든 노래를 영상으로 제작해서 사람들에게 알리게 되었습니다. 그 프로젝트를 마치고 나서 가족과 함께 7개월간 스웨덴에 머무르면서 재충전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돌아와서 본격적으로 스탠드 업 커뮤니티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인생에서 위기를 만나 넘어진 가정들을 다시 세우기 위한 플랫폼을 만들어보고 싶었습니다.

Q: 스탠드 업 커뮤니티 이후에도 승일희망재단이나 속초 국제 장애인 영화제 등 다양한 NGO 단체에서 활동을 해오고 계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양한 이웃들을 만나시면서 무엇을 느끼셨습니까?
A: 말씀하신 기관들에서의 경험들이 제게는 동일한 활동이라고 설명드릴 수 있습니다. 삶을 살아가다가 갑자기 위기를 만난 사람들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분들을 어떻게 도와야 하는가에 대한 훈련을 많이 시키셨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일반적으로 위기를 만난 분들을 대할 때, 그 현장에 계시지 않는 분들은 위기에 대한 개념이 막연합니다. 저는 삶에서의 위기는 일상을 이어가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위기를 만나면 자기가 무너진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제 경험으로 위기가 자기를 무너뜨리는 충격을 주기는 하지만 동시에 새로운 시간으로 가는 문을 열어주는 느낌을 줍니다. 새로운 문이 열리는데 이 새로운 문을 온전히 지나지 못하고 주저 앉아버리면 그 위기는 트라우마로 남게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때 공동체의 힘이 필요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위기의 순간에 누군가가 적절하게 그들의 삶 가운데 함께 해주면 위기를 만난 분들이 위기라는 문을 통과해서 새로운 길로 나아 가는데 큰 힘이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에 위기를 만난 분들을 통해서 새로운 역동성이 일어남을 경험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위기를 만난 사람을 보면, 자기는 상대적으로 멀쩡하니까 더 나은 상황이니까 위기를 만난 사람을 돕는다는 개념으로 옵니다. 결국은 이 사람들이 위기에 처한 연약한 존재를 만나는 포인트가 생기면서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밝히지 않는 이야기를 풀어놓는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연약한 존재를 중심으로 모인 모임에서는 그것을 풀어놓는 일들이 가능함을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모인 분들이 나는 이곳에 “도움을 주려고 왔는데” 오히려 “도움을 받고 간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 순간에 공동체가 갖고 있는 역동성과 힘이 드러나게 됩니다. 물론 여기에도 한계나 약점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중도 중증 장애를 입은 분들을 도우러 오신 분들은 자신의 연약함을 드러내면서 회복의 경험을 하는 반면에, 중증 장애를 입은 분들은 장애를 안고 살아가면서 겪는 새로운 문제에 대해서 그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다른 중증 장애우와만 소통하고자 하는 새로운 한계가 생기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쉽게 이야기할 수 없는 생리적 현상 등이 예가 될 것 같습니다. 이런 부분들을 장애를 먼저 경험한 사람이 이제 막 장애를 겪기 시작한 분들에게도 설명해 주는 것이 큰 도움이 됩니다. 서로를 이해하니 편한 소통이 됩니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지 않아야 합니다. 스탠드업커뮤니티에서 스스로 이런 한계를 설정하지 않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경추를 다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반적인 활동의 범위를 넘어서는 사례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경추를 다친 사람이 일반적으로 살았던 삶과는 아주 다른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장애를 만난 분이 동일한 장애를 겪는 분들과만 소통을 하다 보면 일반적인 틀에 갇히기가 쉬운 것 같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공동체를 만들고, 위기를 만난 분이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삶으로 들어가는 문을 잘 지나갈 수 있도록 공동체가 함께해 주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Q: 지금까지 말씀해 주신 것들이 실은 교회가 늘 해야 한다고 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김태양 목사님도 목회를 하고 계시지만, 지금까지 위기를 직면한 이웃들을 만나 오신 방식은 기존의 교회들의 방식이나 접근과는 사뭇 다르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를 들어 방금 말씀에서도 함께 있어주는 것이라는 표현을 하셨는데, 일반적으로는 돕는다는 표현을 더 많이 사용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표현 혹은 접근 방식의 차이는 어디에서부터 기인한다고 생각하십니까?
A: 저는 교회라는 배경에서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온 사람입니다. 교회는 제게는 큰 놀이터와 같았습니다. 요즘 선교적 교회가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데 저 역시 목회자로서 선교적 접근에 대한 많은 고민이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부터 목회자가 꿈이었다고 말씀드렸는데, 꿈꾸던 목회자가 되어서 좋은 것도 있지만 그 자체가 선교적인 삶을 살아가는 데 한계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어디까지가 목회자의 역할인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흔히 목회자를 교회의 리더라고 이야기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리더의 역할은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방향에 대해 지속적으로 말하는 것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초대교회의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이 교회를 세우고, 목회자는 교회를 세워가는 성도들에게 올바른 방향을 지속적으로 전달하는 역할에 가깝게 보입니다. 어느 순간부터 이런 모습이 많이 사라지는 느낌을 갖고 있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드리면, 성도들이 교회 프로그램 안에서 하나하나 교육을 받고 나면, 교인은 될 수 있을 것 같은데, 교회를 세우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이 됩니다. 그동안 한국 교회가 해온 제자 훈련과 같은 프로그램이, 이미 정해진 교회의 방향과 영역 안에서 일을 하는데 초점이 맞추어진 것 같습니다. 물론 그 시대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쓰임 받은 바가 있기 때문에 비난의 대상이 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지금 시대에는 그 스펙트럼이 보다 넓어져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완벽한 모델을 그리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누군가가 이러한 도전을 할 때에 저의 도전이 좋은 사례로서 적용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비록 저란 사람은 완벽하지 않지만 삶에서의 저의 도전이 누군가에게 도전을 줄 수 있다면, 교회가 보다 다양한 모습을 가지는데 저의 노력이 기여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많은 주류 교단에서 목회자가 아닌 성도들이 교회를 세우는 일은 아직까지도 제약이 많다는 생각도 듭니다.
Q: 지금 하시는 도전들은 목사 김태양으로서의 도전입니까? 성도 김태양으로서의 도전입니까?
A: 저는 성도 김태양, 그리스도인 김태양으로 이 일을 하고 싶은데 아직은 목사 김태양으로 보는 시각이 더 많다는 것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제가 하는 일들을 두고 “당신이 목사니까 그 일들을 하지…”라고 생각하시는 경우가 훨씬 많은 것 같습니다.

Q: 성도 김태양으로 그 일들을 감당하고 계시다면, 김태양 목사님은 목사의 역할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A: 지금 한국의 상황에서는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중 첫째는 주일 날 예배당 안으로 들어갔을 때, 그 시간과 공간을 주관하는 사람으로서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배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역할이 실제 성도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바는 그리 크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전형적인 역할을 벗어나 인격적인 교제가 있다고 하더라고 삶에 실제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어려워 보입니다. 성도들이 교회 생활을 엄격하게 규정해 두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즉 예배당 안에서 예배나 교회의 양육 프로그램이 교회 생활이라는 규정이 강한 것 같습니다. 이 규정된 틀을 어떻게 깨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는데 이상적인 방향은 알겠지만 아직 적용하기에는 모호하고 불분명한 점들이 많습니다. 그러한 규정화된 교회 생활의 틀을 깨는 것이 목회자의 역할이라면 제가 그것을 잘 할 수 있는가를 자문할 때, 자신 있는 답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다만, 목회를 하면서 제가 느낀 목회자의 역할은 성도 각자 각자가 자신의 탈무드를 쓸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각자가 탈무드를 쓸 수 있도록 도전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둘째가 될 것 같습니다. 목회란 성도들이 토라를 가지고 자신들의 삶에 적용할 탈무드를 쓰도록 하는 일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목회자들이 탈무드를 써줄 테니 그 탈무드대로 살라고 하는 느낌이 듭니다. 더구나 그 탈무드는 교회가 만들어온 시간과 공간에서만 통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 말씀은 저에 대한 반성이기도 합니다. 누가 목회자들도 자신의 탈무드를 갖고 살고 있는지를 묻는다면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 길을 제시할 수 있는 삶의 모습을 만들어 가는 것이 목회자가 가져야 하는 중요한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한편 현실을 살고 있는 목사로서 여전히 교회의 조직을 세워가는 효과적인 방법으로서 제자훈련의 기능을 보면서 그 한계점을 알고 있지만 그 대안을 명확히 말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해 자괴감이 들기도 합니다. 어느 쪽에 대해서도 확실하게 말할 수 없는 지금의 현실이 목사로서의 제게는 참 아프게 다가옵니다.
Q: 탈무드와 토라를 통해서 목회자의 역할을 설명해 주신 것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각자가 탈무드를 쓰는 것이 중요하지만 누가 써준 탈무드를 따라서 하는 것이 더 편할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목회자가 탈무드를 쓰도록 돕는다고 해도 성도들이 탈무드를 쓸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말씀하신 바가 이루어지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목회자의 입장에서 한국 성도들이 탈무드를 쓸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A: 목회를 하면서 상대적으로 긴 시간 동안 성도들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분들이 제자 훈련을 받으시는 것을 보고, 사역 훈련을 받으시는 것도 보고, 교회에서 정해 놓은 프로그램에 따라 순장으로 섬기기도 하시는 것을 보아왔습니다. 그중에 어떤 분은 순장에서 떠나는 일도 있으신데, 사역을 놓으시면서 너무 쉽게 삶과 신앙이 분리되는 모습으로 돌아가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분들이 매우 열정적으로 일하셨던 시간들을 제가 봐왔기 때문에 제게 그분들의 급격한 변화가 매우 이상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분들이 사역에 매진하시면서 너무 기뻐하시던 모습을 보아온 입장에서 정말 그런 훈련을 받으시고 사역을 하셨던 분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원상 복귀가 되어 있는 느낌이 들 때가 있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재교육에 대한 이야기가 여러 교회에서 나오는 것 같습니다. 제가 섬겼던 분당 우리 교회는 일상 훈련이라는 이름으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성경을 다시 읽도록 하는 것 다시 성경을 본인들이 읽게 하는 일들을 하자고 합니다. 삶과 분리되지 않은 성경 읽기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교회의 영역을 이미 결정한 성경 읽기 방식이라 생각합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 여러분들께서 마을 공동체와 같은 방식도 실험하시는 것 같습니다. 마을을 만들어서 목사가 마을의 장 같은 역할을 맡아서 공동체의 중심에서 일을 추진해 나가는 방식의 대안을 시도하시는 분들도 많이 뵈었습니다. 그런데 도시 환경에서 이런 공동체를 만들고 유지하는 것은 마을을 세우는 것과는 다른 환경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많이 고민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요즘 우크라이나 지원 공동 대책 위원회를 조직해서 우크라이나를 돕고자 하시는 분들과 함께 하고 있는데 이 위원회가 세계 위기에 교회가 대처하는 좋은 사례로 발전하기를 소망합니다. 위기가 있는 곳에 성도들이 함께 가서 그냥 그 넓은 캠프를 한 번 만들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캠프는 공공의 영역입니다. 그 공공의 영역 속에 교회들이 막 들어가 보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부딪히면서 교회의 언어로 소통이 되지 않는 것도 경험해 보고, 그러면서 그 안에서 같이 공존하면서 교회의 언어를 공공의 환경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지에 대해서 고민해 볼 시기가 되지 않았는지 생각해 봅니다. 이런 실험의 결과에 대해서는 늘 여전히 이리로 저리로 부딪히고 깨지는 느낌이 듭니다. 비록 힘들기도 하고 괴롭기도 한 경험이지만 저는 이 일을 해 보고 싶습니다. 성도들이 준비가 되어있는가에 대해서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성도들의 삶에서 이것이 가능함을 보았습니다. 성도들이 삶에서 자신의 탈무드를 이야기할 때, 그리고 삶으로 자신의 탈무드를 전하는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루었을 때, 누군가의 탈무드가 왜 나왔는가에 대한 질문들이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성도들이 자신의 탈무드는 토라로부터 받았음을 고백하는 것을 봅니다. 물론 각자의 탈무드가 완전하지는 않습니다. 누군가가 자신의 삶에서 탈무드를 이야기한다면 그 탈무드를 보고 들은 사람들은 다른 탈무드를 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인상 깊게 본 그 탈무드가 어디서 나왔는가를 묻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때 각자의 탈무드가 토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목회자의 역할도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바로 성도들에게 그러한 삶을 살도록 도전하는 것입니다. 또한 그 모든 도전이 토라로부터 나온 것임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바로 머리이고 바로 그리스도라는 점을 말하는 것이 목회자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Q: 한국 교회에 대해서 안타깝게 생각하시는 점이 무엇입니까? 또 그럼에도 우리가 희망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A: 한국 교회는 기적입니다. 세계의 많은 교회들이 한국 교회를 기적이라고 생각하고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단기간에 교회를 이렇게 이룬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교회는 사랑해야 할 대상입니다. 교회는 사랑해야 할 대상이지 종교 개혁 때처럼 95개조 반박문을 걸어야 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95개조 반박문도 루터가 교회를 사랑한 표현이라 생각합니다. 사랑한다면 잘못된 것이 드러났을 때, 이것을 고치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한국교회의 모습이, 대형화된 교회의 모습이 괴물과 같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신 일을 다 거부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다음 세대의 목회자들이 한국 교회의 과거를 부정하는 게 목회의 출발점이 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대신 보다 힘써야 하는 것은 우리 시점에서 진정으로 필요한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필요한 것들을 이야기하면 교회의 스펙트럼이 넓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디가 교회의 끝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최근에 제임스 웹 우주 망원경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주의 신비를 밝혀줄 단초를 제공해 줄 수 있다는 뉴스에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우주에 대해 얼마나 볼 수 있을까요? 우주의 신비가 밝혀진다는 것은 우주의 시작과 끝을 볼 수 있어야 가능한 것 아닐까요? 저는 교회의 스펙트럼을 결정하는 것은 그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시대가 진행됨에 따라 교회의 스펙트럼이 넓어지고 있다면 우리는 교회의 스펙트럼을 다 경험하지 못했다는 우리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겸손함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저는 그런 의미에서 지금 교회와 내일이 성도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희망의 한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꼭 100명을 채워주시기를 당부드립니다. 그 스토리들이 모였을 때, 이것이 교회와 내일의 스토리가 아니라, “한계가 있는 일부의 이야기지만 교회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스토리이기 때문에 조금만 귀를 기울여서 들어주십시오”라는 겸손함으로 전해 주신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제가 읽은 성경 말씀 중에 제일 황당한 말씀이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 찌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는 말씀입니다. 옛날에는 이 말씀이 매우 화려하고 멋진 이야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 머리까지 자라나라고 이야기하는데 이게 너무 황당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성숙한 머리에는 절대 자라나는 육체가 붙어서는 안됩니다. 성숙한 머리에 자라나는 육체가 연결된 것을 우리는 장애라고 이야기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끔찍한 이미지입니다. 그 이미지를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시냐면, 괜찮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건 내가 선택한 거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바울이 이 부분을 쓰면서 정말 깜짝 놀랐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완성된 머리에 자라나는 육체를 같이 붙일 수 있지?” 저는 그 불완전한 존재가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란 머리 되시는 그분이 완성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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