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20.교회를 위한 좋은 무기를 공급하는 것이 저의 사역입니다:개혁 신학의 정수를 소개하는 도서출판 다함의 이웅석 대표


Q: 도서출판 다함의 사역과 본인에 대한 소개를 부탁합니다.

A: 제가 하는 일이 사역인지 사업인지 분명히 말씀드리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사업 혹은 사역이라는 정체성에 대해서 5년 동안 고민해 왔지만 아직도 여전히 혼란스럽고, 지금도 명확하게 규정하기가 어렵습니다. 사실 두 가지 목적이 공존하고 있는 것, 더 정확하게는 두 가지 모두를 고민해야만 지속할 수 있는 일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둘 중 하나로 규정하기에는 어려운 딜레마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왜 이 일을 하는지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문서 사역, 문서 선교와 같은 거창한 단어보다도 사실 저 스스로 견디기 어려웠던 것이 가장 직접적인 이유였던 것 같습니다. 교회 생활을 하면서, 그리고 신학을 공부하고, 교회에서 사역하면서 교회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데, 제가 배운 것들과 실제 겪는 것 사이에서 뭔가 어긋나는 것들을 느꼈습니다. 그런 어긋남이 왜 느껴지는지에 대해서 오랫동안 고민했는데, 막상 신학교를 다닐 때는 잘 몰랐고, 오히려 학교를 마치고 나서 책을 통해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정작 신학교에서는 신학에 대한 원초적인 깊은 질문을 던지지는 못했던 것 같고, 어른들, 즉 목사님이나 선배님들이 시키는 것과 가르치시는 것이 다 옳다고 생각하고 따르려던 모범생이었던 것 같습니다. 성적도 잘 나왔고,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말씀 읽고, 교회 봉사도 열심히 했던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생활을 열심히 하면 할수록 이게 다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깊이 들었습니다. 제 안에 이 답을 찾지 못한 채로 목사가 되는 것이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 신학대학원 진학을 미루고 직장생활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신앙에 대한 갈망과 소명에 대한 빚진 마음이 제 안에 항상 있어서, 교회를 완전히 떠나지도 못하고 또 깊숙하게 들어가기는 좀 두렵고 그랬던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습니다. 늘 고민했던 것이 내가 분명히 사랑하고 내가 추구하고 내가 책에서 보았던 교회는 아름다운 천상의 모습,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어야 하는데, 실제로 보이는 교회는 왜 이런지, 또 막상 목회 현장에 교역자로 들어가 보니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보이는 딜레마들, 이런 문제들에 대한 답을 책을 통해서 조금씩 찾아 가면서, 수천 년 하나님께서 다스려오신 한결같은 교회의 모습 가운데 내가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교회의 모습은 아주 작은 부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시간적으로도 수천 중의 잠깐일 뿐이고, 공간적으로도 수백 개의 나라 중의 동방의 작은 나라에서 보여는 모습일 뿐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어쩌면 대학교를 졸업하고 나서야 비로소 본격적으로 신학을 공부한 셈인 것 같습니다.


Q: 그런 내용이 사명 선언문에 담긴 것이라고 이해가 됩니다. 특별히 개혁 신학에 관심이 많으신 것으로 보이는데 어떤 계기가 있으셨습니까?

A: 제가 졸업한 총신대학교도 개혁주의 신학을 지향합니다. 저도 열심히 칼빈이나 벌코프의 책을 읽었습니다. 하지만 그 외에도 개혁파 신학에 더 넓은 지평이 있다는 것을 그 당시는 몰랐습니다. 오히려 학교를 졸업하고 5년여 동안 교회를 이해하기 위해서 혼자 탐구를 하면서 만났던 개혁파 신학에서 제가 생각한 이상에 가까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나름의 답을 찾았다는 생각이 든 시점에서 보니, 다시 신학을 시작하기에는 시간도 상당히 지났고, 가정을 이루게 되면서 여건도 많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잠정적으로 대학원 진학은 포기했지만 계속해서 책을 읽었습니다. 제 안에 있던 신앙에 대한 갈망, 교회에 대한 갈망을 책으로 풀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이 시기를 통해서 나름의 제 신앙 혹은 신학을 정립할 수 있었고,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그룹과 만나게 되면서, 모든 목회자가 사회적으로 동경하는 큰 교회를 꿈꾸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들과 교제하면서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전체적인 그림을 보고 신앙의 보편성과 교회의 보편성을 추구하는 개혁파 신학 특히 바빙크라는 신학자에 깊이 매료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저의 고민의 지경과 신학에 대한 이해가 더욱 깊어졌던 것 같습니다.

좋은 책에 관한 관심이 늘면서 원서도 읽게 되고, 또 혼자서 알기에는 아까운 책들을 출판사에 번역해서 출판해달라는 요청을 했는데, 반응이 없었습니다. 제 생각에는 이런 책들이 한국 교회에 개혁과 회복의 디딤돌이 될 것 같은데, 이 책들이 소개되지 않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고, ‘그냥 내가 한번 해 볼까?’ 이런 마음으로 시작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직장 생활에서 외주 편집이라든지 번역을 했던 이력도 결심을 하는데 영향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그 일이 이렇게까지 될 줄은 생각도 못 했습니다.


(도서출판 다함의 블로그에서 : https://blog.naver.com/dahambooks)


Q: 책을 통해서 한국 교회와 나누고 싶었던 메시지는 무엇이었습니까?

A: 한 마디로 말씀드리자면 보편성입니다. 보편성과 유기성이라고도 말씀드릴 수 있는데, 설명해 드리기에 앞서서, 제 생각에는 한국 교회라는 용어는 뚜렷한 실체가 없는 것 같습니다. 뜬구름처럼 있다가도 없어지고, 없다가도 있어지는 것 같은 개념이라고 봅니다. 모두 한국 교회라는 단어를 쉽게 사용하지만, 과연 한국 교회를 어떻게 규정할 수 있겠느냐는 의문도 들고, 그래서 저에게는 한국 교회의 개념보다는 보편 교회에 대한 개념이 더 강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바빙크는 신학이 보편 교회의 성도와의 교제라고 했는데, 보편 교회의 성도란 단순히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아담 이후로 교회에 속한 모든 하나님의 자녀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보편성이란 시간적으로도 공간적으로도 매우 광범위한 개념입니다. 저는 현장의 교회에서 교회의 보편성이 확인되지 않을 때, 아프고 실망스러웠고, 반면 교회의 보편성을 믿기 때문에 다시금 교회의 희망을 찾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교회의 보편성을 인식하기가 점점 어려운 시대 같습니다. 시대 자체가 감각적이고 직관적인 인식을 선호하고 깊은 사고와 장기적이고 통시적인 시각을 중요하지 않게 보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 보니, 내가 속한 교회 혹은 내가 겪은 교회가 교회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공교회적의 개념이 약화되면서, 잘못에 대해서도 기준이 모호해지고, 윤리적인 문제 즉 교회 세습 문제나 목회자의 일탈과 비리에 대해서도 상황적인 이유를 찾기에 급급한 것 같습니다. 교회나 목회자의 윤리적 실패를 교회의 전체적인 그림에 비추어서 봐야 시대의 조류에 영향을 받지 않는 확고한 기준을 세울 수가 있습니다. 제가 개혁파 신학을 좋아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를 토대로 쌓아 올린 교리가 든든히 서 있기 때문입니다. 개혁신학은 상황신학과 달리, 시대나 사상의 조류가 아닌 성경에 기초해서 교회를 이해하고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기 때문에, 변해가는 시대사조 속에서 올바른 길을 찾도록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지금 우리가 보고 겪고 생활하는 이것이 다가 아니라, 하나님이 분명한 원칙을 갖고 수천 년 동안 당신의 교회를 이끌어 가신 그리고 당신의 백성을 다스려 오신 진리의 원리가 있다는 점을 알리고 싶었습니다.


Q: 신학교를 졸업하시고, 교회에서 교역자로도 활동하셨고, 회사에서 근무도 하셨고, 또 지금은 비즈니스의 영역을 경험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다양한 삶의 영역에 대한 경험이 있으신데, 다양한 삶의 위치에서 종합해 볼 때, 지금의 교회의 모습에서 가장 안타까우신 점은 무엇입니까?

A: 저는 교회가 신학이 없거나 혹은 잘못된 신학을 갖고 있다는 점이 가장 안타깝습니다. 교회가 한국에서 지금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역사적인 배경이나 사회적인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종합적인 현상일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이해하는 바에서는 우리나라처럼 복음이 단순하게 들어온 경우는 없는 것 같습니다. 19세기 말 우리나라에 복음이 전파될 때, 미국을 중심으로 세대주의 종말론이 확산된 상태에서 그 영향을 강하게 받은 분들이 선교사로 오셨습니다. 이후 식민지 지배와 한국 전쟁 등 최악의 상황을 겪으면서 기독교는 더욱 내세적인 관점에 의지하기도 했을 듯합니다. 결국 이런저런 영향으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는 여덟 글자로 요약할 수 있는 구원관이 한국에 강하게 자리 잡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사실 기독교의 복음은 이보다 훨씬 풍성한 의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풍성함과 부요함이 여덟 글자를 통해서는 전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 이후로도 한국 기독교는 경제적, 정치적인 상황과 맞물리면서 이러한 상황들을 신학적으로 정당화하는 상황신학이 강하게 영향을 주었던 것 같습니다. 일례를 들어 ‘삼중 복음 오중 축복’으로 요약되는 순복음 신학도 경제 성장기에서 경제적, 사회적 상승 욕구가 강한 한국 기독교인들이 찾고 있던 신학적인 근거를 제시했다고 생각합니다. 이와 같은 상황신학이 한국에서 기독교가 확대되는데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를 통해 성장한 한국의 기독교가 지금 어떤 모습인지에 대해서도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계시하신 원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근거를 두어서 교회를 이해하고 우리가 믿어야 할 바와 행할 바를 분별해야 합니다. 신앙의 선배들이 성경의 계시에 근거한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 애써왔던 그 발자취가 교회의 역사 안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지금의 한국 교회의 모습이 그러한 원형에 가까워지도록 하나씩 하나씩 바꾸어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학의 부재 혹은 신학의 변형이 가장 안타깝게 여겨집니다.


Q: 한국 교회의 신학에 대한 문제는 오랫동안 지적되었고 같은 인식을 하시는 분들도 많이 계실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적지 않은 시간 동안 한국 교회는 왜 교회적인 삶을 살아내는 데 필요한 신학을 정립하지 못했다고 생각하십니까? 혹은 한국 교회가 이런 신학의 정립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느끼시는지요?

A: 개인적으로는 한국 교회는 이미 정립된 신학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그 신학을 반드시 한국 신학자들이 주도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게는 개혁 신학이 정립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에 있고 실천하는 과정에 있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쉽지 않은 이유는 맘몬의 영향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급속도로 커지면서 신학을 정립하기 이전에 부흥을 맛보고, 몸덩이가 커지면서 권력도 갖게 되는 상황이 생겼습니다. 처음에 기독교의 부요함과 풍성함이 차근차근 잘 들어왔으면, 우리 자신도 분별력을 갖고 잘못되었을 때 돌아갈 길을 찾을 수 있는데, 전체적인 조망이 없는 상태에서 파편적인 복음만 붙잡고 갈 때에는 무엇인가가 잘못되었을 때, 돌아가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도 알 수가 없습니다.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체계적으로 신학을 공부하신 분들도 늘어가고 있고, 깊이 있는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깨달은 것들이 진짜이기 때문에 다시 그 길로 돌아가자고 하기에는 너무 많이 지나쳐 온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나름대로 여러 해답을 찾고 방향을 찾으려 애쓰고 있지만, 근본적인 부분에 대한 충분한 고민 없이 현상에 대한 대증적인 접근만 집중하고 있는 것 같은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2021년 출간한 다함의 책들 사진출처: 도서출판 다함 페이스북 공식 계정)


Q: 최근 출판하신 책들을 보면, 국내 저자들의 책이 부쩍 늘어난 것 같은데, 이러한 변화에는 방금 말씀해 주신 인식이 반영된 것입니까?

A: 기본적으로는 아직 소개되지 않은 개혁파 고전을 찾아내서 소개하는데 일차적인 관심이 있고, 두 번째로는 개혁파 신학과 신앙을 갖고 사역하시는 목회자와 그 교회의 이야기에 관심이 있습니다. 한국 교회에 대한 안타까움은 있지만, 아예 무너뜨리고 새롭게 세워야 한다는 주장에는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지금의 모습이 왜곡되었더라도 분명히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교회고 그것이 아쉬운 면이 있다고 하더라도, 장엄한 하나님 나라가 형성되어 가는 중에 겪게 되는 부분적인 아픔일 뿐입니다. 같은 의미에서 어떤 교회가 바람직하고 완벽한 개혁교회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고 한들 그 안에 어떤 아픔도 없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에서 개혁신학이 다른 신학보다 더 우월한지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기껏해야 근소한 차이거나, 하나님 보시기에는 모두 낙제점일 확률이 높다고도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특정한 신학적 노선에 따른 급진적인 변화보다 조금씩 조금씩 서로 발을 맞추어서 변화해 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제게는 그 중심에 개혁파 신학이 있기 때문에 개혁 신학을 견지하면서 성경적 신앙을 추구하시는 목회자분들의 목소리를 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두 개의 경로처럼 보이지만 실은 하나의 길이기도 합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다른 나라와 우리나라, 교리와 실천이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교회의 보편성 안에서 하나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개혁파 신학은 교회 중심적인 신학이고 교회를 위한 신학입니다. 저는 특별히 네덜란드 신학에 많은 관심을 두고 있는데, 교리에 따라 네덜란드 교회도 많은 분리를 겪었지만, 그 안에는 순수한 신앙에 대한 열망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순수한 신앙을 지키기 위해 경건을 추구하는 경향도 발견됩니다. 지금의 기준으로 그 경건이 과연 정답인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판단이 가능하겠지만, 적어도 한국 교회가 그 중심에 있는 생각들을 눈 여겨서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국가의 도움을 거부하고, 자신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자녀들을 위한 학교를 세우는 모습은 유난을 떠는 분리주의자의 모습으로 비추어질 수도 있지만, 반면 신앙을 삶의 가장 우선되는 가치에 두려는 삶의 태도이기도 합니다. 내가 주류사회로 들어가지 못하더라도 신앙과 신념을 지키겠다는 각오를 한국 교회가 좀 배워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듭니다.

교회가 성도들에게 좀 인기가 떨어지더라도, 성도가 많이 와서 유력해지고, 사회적인 영향력을 갖는 것보다 그래서 일만 명이 모이는 교회가 열 개가 되기보다는, 백 명씩 모이는 교회가 천 개가 되기에 힘쓰는 것이 교회의 연대를 통한 보편성을 더 분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Q: 최근 이중직에 대한 논의가 점점 필요해지는 것 같습니다. 목회자가 교회의 경계를 허물고 성도들의 삶과 세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의견도 있고, 말씀 봉사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A: 아마 자생력을 갖춘 대형 교회는 크게 영향을 받지 않을 수는 있지만, 일부 대형교회를 제외한다면, 이미 이 문제에 대해 옳고 그름의 문제로 접근하기에는 목회자들의 생존 여건이 너무 치열한 것 같습니다. 요즘에는 청빙받는 것이 개척보다 더 어렵다는 이야기도 합니다. 배출되는 목회자에 비해서 사역할 수 있는 교회는 한정되어 있습니다. 개척해도 자립을 위해서는 최소한 스무 가정 정도가 있어야 할 텐데, 이 규모를 이루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 규모에 이르지 못한 교회는 목회자도 가정을 유지해야 하므로 이중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보다 근본적인 핵심은 목회자를 포함한 직분의 회복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중직의 문제는 현실적인 이유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지, 그 자체가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습니다. 앞으로 한국 교회가 어떻게 변화해 갈지는 섣부르게 예측하기 어렵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도 변화의 과정 중에 있다는 것입니다. 불과 십 년 전만 해도 보수 교단에서 이중직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도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제는 일부 교단은 이에 대한 구체적 논의를 진행하고 있는데, 벌써 변화된 상황에 대한 인식과 이에 대한 반응이 나타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가 유지해온 전통과 질서 그리고 개혁교회의 원리들이 잘 고찰되고 이를 고려해서 변화의 방향이 세워지기를 바랍니다.


Q: 출판하신 책 중 상당수는 신학교에서 교과서로도 채택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신학교에 관한 이야기를 좀 해보고 싶은데, M.Div 과정 즉 목회학 석사 과정이 목양을 위한 실천적인 과정이냐, 아니면 신학이라는 학문을 연구하기 위한 기초적인 과정이냐에 대한 인식이 혼재된 것 같습니다. 보시기에 현재 한국 신학교육이 지향하는 부분이 무엇이라고 보시는지요?

A: 두 가지 목적이 다 존재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과학혁명과 함께 도래한 계몽사회 이전에는 신의 존재 혹은 신학의 정당성을 입증할 필요가 없던 반면에, 계몽화된 사회에서는 그 존재 이유를 증명할 필요가 생겼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신학을 다른 학문과 동등하게 대결할 수 있는 위치에 두려는 노력이 반영되어서 신학을 변호하기 위한 내용도 학과에 반영되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더욱 근본적인 신학 교육의 어려움은 신학교의 운영 목적이 본질에서 상당히 이탈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교회를 중심으로 생각해 볼 때, 개혁신학의 정치구조는 목회자의 임명에 대한 권한을 노회가 갖고, 노회가 모인 총회가 교회를 위해 목회 후보생을 훈련하는 구조입니다. 따라서 목회 후보생 역시 노회가 추천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는 지교회의 성도들은 목회 후보생의 성장과정에서 발견되는 외적 소명에 대한 증인으로서 기능하게 됩니다. 하지만 교세 확장에 초점이 맞추어지면서 이러한 질서가 취약해진 것 같습니다. 이것이 한두 해 동안의 일이 아니라 이 삼십 년에 걸쳐서 진행되다 보니, 소명에 대한 분명한 의식도 없고 소명에 관한 기준도 없는 상태가 되지 않았느냐는 생각이 듭니다. 그 결과로 후보생의 인성이나, 지적인 역량에 대한 고려 없이, 수련회에서 은혜를 받았다는 것이 목회자가 되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는 것 같습니다. 이미 수십 년을 지속해 온 문제를 일시에 뜯어고치기는 어렵겠지만, 목회자의 전인적인 양성을 위한 신학교육이 회복되는 방향으로 차례대로 조금씩 조금씩 순리를 따라 변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Q: 출판하시는 책이 일반 성도들에게는 조금 어렵게 느껴지기도 할 듯한데, 책을 고르시는 기준이 있으십니까?

A: 한국 교회에서 저의 역할은 군대에 비유하자면 군무원 정도 혹은 군수 업체 정도가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실제 삶의 현장에서 분투하시는 성도들과 직분자들이 잘 싸울 수 필요한 물품을 공급하는 것이고, 저는 책을 통해서 그런 공급을 하는 사람입니다. 저 역시 그 전투를 치르고 있는 사람으로서 당연히 같이 고민하고 소통해야 하지만, 그 무기를 적재적소에 사용하는 것은 각 교회에 있는 교역자들과 성도들입니다. 제가 그분들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무기를 사용해야 하는 것까지를 세부적으로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원리에 충실한 책을 내려고 애쓰지만, 저희가 내는 책은 교회의 사역을 돕는 책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보다 대중적인 개인 영성에 관한 책을 내면 좀 더 많이 책이 팔릴 수도 있고, 돈도 더 벌 수도 있어서 부담도 적을 수 있지만, 원리적으로 탄탄하고 중요한 원석을 발굴해 소개해야 교회에서 쓰임새가 많을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물론 기독 출판계에 개인들을 위해 보다 대중적인 책을 내는 출판사도 필요하겠지만, 제 몫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랬으면 돈은 벌써 좀 벌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웃음) 어찌 되었든, 제가 바빙크에 꽂혀서 시작한 일인 만큼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더라도 저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이고, 그게 제 몫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Q: 신학이 평신도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A: 일단 평신도의 삶과 목회자의 삶이 근본적으로 다를까요? 직업(職業)이라는 단어는 어떤 기능을 나타내는 직이라는 글자와 일을 나타내는 업으로 구성된 단어입니다. 예를 들어서 교사라는 직업은 누군가를 가르치는 행위로서의 직(職)과 누군가가 배움을 얻어서 성장시키는 일이라는 업(業)으로서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르치는 행위는 그 대상이나 가르치는 내용이나 수준에 따라서 천차만별일 수 있지만, 이 가르침을 통해서 누군가를 성장시킨다는 그 본질적인 일의 목적은 바뀌지 않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성도나 목회자들 모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역할은 바뀌지 않습니다. 업으로서의 관점에서 성도와 목회자 모두 같은 목적을 가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신 달란트와 각자가 성장한 배경 때문에 소질과 역량은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즉 업을 이루어가는 수단으로서의 직은 다를 수 있고 변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신학이 성도들에게 업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역할, 교회로서의 정체성을 인식하는 것은 우리 인생의 업을 이루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부활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 간에 동일한 직을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임하는 태도와 직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목적도 다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업은 우리의 가치관을 반영한다고도 할 수 있을 듯합니다. 그 업에 있어서 교회로서의 참 소망을 갖게 해주는 것은 신학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그저 피상적인 개념으로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실천을 이끌어 내는, 즉 직을 수행하게 하는 원동력으로서 작동하기 위해서는 신학이 올바로 자리 잡아야 합니다.


Q: 그렇다면 한국 교회의 희망은 어디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A: 하나님의 선하심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저 무익할 뿐이고 악할 뿐이지만, 하나님은 변개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선하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선하신 하나님이 지금까지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들을 어떻게 선하게 인도하셨는지를 역사 속에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에 거기에 희망을 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눈앞의 현실만 본다면 대안이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조급함이 들고 깨뜨려버리고 싶은 마음, 다른 것을 찾고 싶은 마음도 들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통해서 역사하시고 교회를 사랑하시고 지금도 그 교회를 세워가고 있으시기 때문에 또한 이 일들을 강하고 선하고 아름다운 그분의 뜻으로 가장 최고의 것으로 이루어 내실 것임을 믿기에 그 안에서 확신과 희망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Q: 마지막으로 이 인터뷰를 보시는 분들께 무슨 말씀을 나누어 주고 싶으십니까?

A: 이미 많은 말씀을 드렸기 때문에 중복될 수도 있겠지만,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교회가 교회의 전부가 결코 아니라는 점을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저도 이것을 믿고 있기 때문에 생계를 걸고, 젊음을 걸고 이 일을 위해서 노력을 쏟고 있습니다. 그 신념이 있기 때문에 이 일을 하는 것이고, 우리끼리 이 안에서 아등바등하다 보면 놓치는 것이 많은 것 같습니다. 또 우리의 시각이 너무 왜곡되기 쉽고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에 내 경험에만 치우쳐서 무엇인가를 판단하고 대안을 찾고, 혹은 비판하는 것을 조심했으면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세상을 만드시기 전부터 작성하신 바가 분명히 있고 그 안에서 택하신 백성을 지혜와 섭리로 인도하신 원리적인 맥락이 있습니다. 인류 역사의 부침 속에서도 이 맥락은 끊어지지 않았고 지금도 유지되고 있다고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역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 역사와 말씀을 비교해서 볼 수 있는 특권을 지닌 세대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지금 눈앞의 문제의 원인을 단지 보이는 현상에서만 찾지 말고, 하나님이 일하시는 큰 그림 안에서 원인을 찾고 성경과 성경을 바르게 해석해 왔던 전통과 역사 앞에서 비추어 본다면 보다 희망적이고 객관적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Comments


bottom of page